<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를 읽고 책 쓴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여성들과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 보람이 커서 다음 책도 써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직 못 쓰고 있습니다만. 책만 읽고도 자신의 문제를 볼 줄 알게 되고 아이와 남편과 이웃들과 지내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여성들은 읽을 때는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는데 “머리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여성도 있습니다. 다시 읽고 와서 만나자 할 수는 없지요. 책 읽은 지 한 해 혹은 두 해 기다려 만난 귀한 기회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왜 자신의 삶과 연관을 짓지 못하는지, 그래서 읽은 책의 뜻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는지 알게 되는 계기를 삼아야 하니까요. 이 만남을 통해 번쩍 정신 들게 되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읽어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반응의 차이는 자신이 온전한 개인으로 살아왔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방향과 속도를 자기 스스로 조정하며 운전해온 사람과 언제나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삶의 뒷자리에 앉아 살아온 사람의 차이입니다. 자기가 운전하면서도 내비게이터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 뒤를 따르기만 하는 사람과 스스로 갈길을 찾아 방향을 정하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면서도 옆집 엄마를 따라하는 경우와 자기 아이를 알고 그 아이에 맞는 자람과 바뀜을 부추기는 엄마의 차이일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엄마가 되기 전에 남과 다른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체험이 있었는지 아닌지의 차이입니다.
늘 양육하는 어른들의 야단만 맞고 자랐다고 하면 자신의 남다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만난 여성 가운데 <엄마가-> 책 제목을 보고 자기를 향해 쓴 책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곧 사서 읽기는 했어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을 해서 궁금해졌습니다. 두 시간 동안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은 우선 “모르겠다” “바보된 것 같다” “자기는 게으르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기력증 (helplessness)을 보입니다. 덜컥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도 불안하고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남편이 괜찮다며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친정어머니와 동생들도 도와주려 애씁니다. 그렇지만 무기력한 자신이 싫고, 도움 받는 것도 미안합니다.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남들 보기에는 멀쩡하게 교육받고 직장생활도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부모 탓 할까 봐 우선 부모님들이 좋은 분들이라고 부모님에 대해 묻지도 못하게 합니다.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진단하고 얼마간 우울증약도 먹어보았는데 효험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부모님이 생계를 마련하시느라 바쁘셨고 할머니, 일하는 할머니, 외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다른 가정에도 바쁜 부모들이 많았지요. 다른 사람의 양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지요. 그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침마다 울면서 일어났는데 그 이유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양육자 어른이 아이가 우는 이유를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도 자신이 울고 싶은 마음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인지 이름표를 붙이는 (labeling)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입니다. 출생신고 때 올렸으니 이름 없이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느낌, 마음의 이름이 없이 살아온 니들이 청년이 되어 사랑한다고 할 때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여성은 자기 아들이 자다가 우는 이유를 알아주는 엄마가 되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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