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중요한 출발점은 부모입니다. 부모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이에게 곧바로 제일 먼저 영향을 미칩니다. ‘돈 문제’로 늘 싸우는 부모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부모님이 여러 가지 다른 문제로 불신하면서 정작 그 본질의 문제는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 돈을 핑계삼아 다투었더라도 아이는 보이지 않는 이유보다 내세운 이유만을 부여잡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른들이 마음을 깊이 숨겨두지 말고 제대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애완동물도 여러 마리 기르면 서로 다른 특징을 봐줘야 다 제대로 자랍니다. 하물며 아이들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엄마와도 다르다는 걸 알아준다면, 아이도 엄마가 자기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알고, 사랑하며 산다면 어떨까요? 서로 다른 점을 흠잡지 않고 사랑한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아이 때부터 어른들에게 자기의 다른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표현하겠지요. 그렇게 자라서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과 다른 자기 뜻을 스스로 존중하여 바깥의 영향에 온통 매몰되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다른 점을 알면 자기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며 고집을 부리지 않겠지요. 엄마와 아이가 억지를 부리지 않고, 아귀다툼하지 않고 서로 듣고, 표현하고, 그래서 조절하고, 협력하며 살 수 있겠지요.
아주 어린 아이가 어떻게 부모를 제대로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 자기마음에 사진 찍힌 인상으로 부모와 관계를 맺으며 자랍니다. 그 뒤로 오랜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인상을 바꿀 수 있는 체험을 다양하게 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나고 정정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 부모와의 현실 경험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면 초기에 생긴 비현실의 부모상을 평생 고집스레 유지하며 살게 됩니다. 오해 속에서 고집스레 살게 됩니다.
늙은이 삶이 어떤 것인지 가늠해보려 합니다. “내가 누구로 살아왔는가?”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두부 모 자르듯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긴 지난 날이 차곡차곡 쌓이고 겹쳐서 오늘에 이른 것이니 오늘의 삶이라고 별다를 것 없이 뒤따라 겹쳐진 연속이라 해야겠습니다.
누구나 들쑥날쑥 자라고 바뀌면서 때로는 아프고, 실망하기도 하면서도 긴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단련하고 적응해온 것입니다. 손등과 팔뚝에 생긴 거뭇한 기미는 모두 요리하며 튀긴 기름이나 다림질하며 덴 눈에 보이는 자국입니다. 표백해서 말끔한 피부를 자랑하기보다 주름진 늙은 살결로 당당히 승리한 표적입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일을 해내고, 사람을 기르고, 생각을 만들어내고, 전통을 쌓아온 것입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자기만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삶이 있고, 아무도 자신을 대치할 수 없는 자신의 지난 날을 완성하는 지점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온전히 용납합니다. 온전한 자기통합이고 성실과 온전함 (Integrity)입니다.
현실에서 보는 많은 노인들이 이런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남다른 자기만의 지난날 역사를 관통하는 일관성을 찾고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자신으로 한 줄기를 꾸준히 살아왔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깥 요인들이 들쭉날쭉으로 자신을 침해했다고 느끼는 막연한 억울함으로 자신을 덮어씌웁니다.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 살아온 겁니다. 전쟁 같은 거창한 바깥 역사나 유행 같은 사회분위기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무리의 술수에 매몰되어버려 자신의 삶이 어쩔 수 없었다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든 노인들이 다 차곡차곡 제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느 누가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도 하고 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도 자신의 삶의 터에서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 마지막을 맞은 것이 아니고 이제도 여기에서 늙은이로 살고 있습니다. 어떤 늙은이인가는 모두 각기 다릅니다. 다른 늙은이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과 같은 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다른 몸으로 달리 숨쉬고 달리 움직이며 살아 이제의 자기가 되도록 살았기에, 각기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대체해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 비교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러워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지나간 날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소중한 시간과 삶의 역사는 ‘타임머신’을 타고 오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소중한 삶을 마구잡이로 살아버리려 합니다. 술에 취해 기분내며 좋아라 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보람 있는 일을 피해가며 지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을 증명하기 위해 사는 듯 보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삶을 대치해주지 못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흉내내며 살려 듭니다.
경제기획도 필요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일방통행이어서는 안 됩니다. 늙은이의 권리와 동시에 늙은이의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돌보는 사람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려면 돌보는 사람에게 아픔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해야 할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서로 책임지고 서로 권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늙은이가 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늙은이의 경험을 알릴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에릭슨의 심리학이 윤리의 심리학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 발달단계를 건강하고 순조롭게 다 거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함께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성취해내는 것을 강조하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협력할 수밖에 살 길이 없다는 것을 곧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손해라고 계산하는 못된 버릇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