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니>에 ‘역사 속의 니’를 쓰고 있는 민아님의 두 아들 산과 강을 며칠 전에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볼 때마다 부쩍 자라서 그 아이마다 자기 자람의 다른 시기를 맞고 있다는 걸 보게 됩니다. “너희가 이렇게 자라니 우리가 늙었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합니다. 개구쟁이 동생을 이해한다는 듯이 “쟤가 몰라서 그래요” 말하는 점잖은 형인 산은 아마도 어른들이 주신 교훈을 되풀이하는 듯했지만, 곧 아이다운 얼굴로 자기 놀이를 하려 시도합니다. 미국 사는 그 애들 고모가 오랜만에 와서 함께 밥(국수) 먹고 차 마시는 곳에 갔습니다. 어른들이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이해되지도 않으니 재미있을 리 없습니다. 동생 강이는 자기 식으로 견딜 수 없다는 걸 표시합니다. 점잖은 형이니 동생같이 떼부릴 수 없는 산이는 스스로 놀이를 만들 수 있고, 또 놀이를 해보려 합니다. 바깥에 나가 유리창을 통해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한 번은 몸을 세워서 높게, 그리고 다음에는 몸을 낮추어 눈을 맞춥니다. 산이를 지켜보던 사람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산이와 그렇게 놀 수 있었습니다. 즐겼습니다. 산이의 표정을 봐서 그 아이도 즐거웠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이렇게 즐길 줄 아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즐겁게 일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고 또 그러려 합니다.
놀이시기의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함께 잘 자라 몸과 마음을 마음대로(自由自在로), 의식하지 않고, 쉽게 쓸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그 때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자유롭지 않고, 억매여서 자라서는 안 되겠지요. 충분한 영양과 휴식과 움직임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어야 합니다. 엄마들이 읽은 어떤 육아서가 지시하는 대로 아이를 기르려 하면서 독특한 자기 아이만의 필요를 놓치고, 아이를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해주지 못하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친정어머니나 다른 어른들의 제안이 더 중요하다 여겨서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인터넷 정보가 아이의 평안한 자람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평안함은(relax) 요가하는 데만 필요한 자세가 아닙니다. 놀이뿐 아니라 삶 전체 건강에 중요한 요인입니다.
몸과 마음을 안정되게 움직이고 멈출 수 있으며 미세한 활동을 구분하고 스스로 혼자 하는 기회를 아이들이 가져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높은 걸상에 앉아서 밥 먹으며 수저와 그릇을 떨어뜨리고 던져보는 시기를 거치는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겁니다. 국수 가락과 콩나물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던 혁빈, 동화, 은유의 옛날(?)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계단을 오르며 높이를 조절하던 그 아이들을 기억합니다. 섬세하게 구분하고 놀기 (살기) 위한 아이들의 준비단계 훈련이었음을 압니다. 아이들을 묶어두고, 엄마가 떠먹이기만 하는 것이 밥상과 마루를 어지르지 않고, 아이 얼굴과 옷을 엉망으로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짧은 안목인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놀이시기에 이른 아이는 이미 어른들 틈에 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만큼 클 자신을 어림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른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상하고 생각하면서 행동해봅니다. 어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열심히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비교합니다. 엄마 편이 되든가 아빠 편이 되는 것은 부모의 관계, 그리고 각자의 태도와 역할에 달려있습니다. 어느 편이 더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은 누가 더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능하다 여기는 엄마는 아이를 자기편이 되게 합니다. 엄마를 무시하는 아버지 품에서는 엄마가 관심밖에 놓입니다. 또 어느 편이 더 아이와 가깝게 지냈는가 하는 것도 아이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합니다. 결국 영향이 더 큰 부모와 아이는 동일시하고 그런 어른이 될 준비를 놀이로 해보게 됩니다. 영향이 힘이라면 자신의 힘을 키울 방안을 가정 안에서 실험해 봅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또래집단에서 힘을 겨루기도 하고 협력하고 생존하는 아이들 나름의 정치판에 들어갑니다.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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