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겉으로 슬쩍 보고, 상냥하게 말 걸고, 행동하는 것으로는 모두 멀쩡한 듯합니다. 자기만 느끼고 있는 걱정, 불안, 두려움을 이야기하기 전까지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보면 정말 괜찮은 것인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전혀 안 보이고 자기의 힘든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부처님 같이 움직이지 않고 무표정인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들으면서 맞장구를 잘 치는 사람도 있고, 누가 있거나 상관없이 손 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기만의 모습이 제 각각입니다. 그런데 자기 나름으로 그렇게 정해진 모습 (pattern)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상담실에서 고치면 좋을 것 같은 자기 모습을 바꾸어야 할 것을 스스로 깨우치곤 합니다. 자기도 답답하다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묻습니다. 오래 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첫 기억을 살려보려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기초 신뢰감’이 생기는 삶의 첫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첫 양육자가 어떤 분인가를 먼저 살핍니다. 대부분 어머니 아버지가 양육자입니다. 그분들이 살기 너무 바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이런 경우 돌보아 주시는 분이 얼마나 아이와 사이에 마음을 서로 알아주고, 서로 믿는 관계를 든든히 만들어주었을까요?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진 ‘낀 동이’도 있습니다. 아니면 언니와 동생이 할머니와 고모네로 보내지고 혼자 남겨진 경우도 있습니다.
바쁘신 어머니 손을 덜어드리는 것에 항의할 처지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힘센 아버지’와 사는 ‘가여운 엄마’ 편이 된 딸로, 그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기도 했습니다.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고, 믿고 의지하고 서로 보살피는 관계를 기대할 수 없는 이웃이라고 일찌감치 세뇌됩니다.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면 인정받을 만하고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긴장하게 됩니다. 울지 않는 ‘착한 아기’에서 시작해서 ‘예쁜 짓’하는 아이여야 했고, 말썽부리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 말은 아이 자신이 자연스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것은 접고, 엄마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려 해내야 합니다.
자기 행동의 기준이 자기가 아닌 엄마의 것을 채택하고, 자기 내면의 동기가 아닌 바깥 기준에 맞춰져 있게 됩니다. 자기 속마음은 모르고, 제쳐두고, 엄마의 마음을 살피고 바깥 눈치를 보며 조마조마 살게 됩니다. 건강하게 살려 하면 마음껏 자기 표현하면서도, 엄마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전해 받아야 하는데, 이미 자기 틀로 제한되어 눈치 보는 것으로는 정확하게 이웃 파악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면서 제대로 엄마 (이웃) 마음도 볼 수 없게 되는, 이래저래 모두 헛다리짚으면서 오해 속에서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만나, 제대로 표현하면서, 제대로 알아주면서 함께 살아야 하는 과제를 해내기 힘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를 오해하기도 하고, 자기도 오해받으며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 없이 살면서 자녀를 가지면 또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합니다. 선대에서 물려받은 대로 후대의 아이들은 또 아이 엄마인 자기를 향해 ‘해바라기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우리가 바뀌고 성장해야 합니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 걱정을 하고 있을 처지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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