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의 첫 해를 넘어 길게 살다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9강
프로젝트

태어나 첫 해를 어떻게 지났을까 여든 해를 더 살고 나서도 묻게 되는 마음입니다. 얼마 전 암 4기라는 진단 받은 늙은이가 있습니다. 요즘을 ‘말기’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수술할 수 없는 단계라는 것을 의사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이 항암치료를 하려 합니다. 그래도 환자의 말에 귀기우리는 의사를 만나 서로의 뜻을 주고받습니다. 한 번 주사 맞고, 두 주 동안 아침저녁으로 두 알씩 약을 먹는 것으로 항암치료 한 주기를 삼습니다. 늙은이의 나이를 생각해서 20% 강도를 낮추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약 없이 쉬는 기간을 갖고 다시 그 짓을 반복하게 합니다. 그걸 ‘치료’라고 합니다.

 

그런데 80노인은 20%나 약하게 처방한 약에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커다랗게 자리잡은 암 덩어리를 언제부터 품고 있었는지 몰라도 치료 이전에는 그리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았으니, 치료라는 이름으로 더 힘들게 살 이유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태어나 첫 해에도 부족함이 없이 보살핌을 받았고, 참을 만한 정도의 불편을 감내하며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늙은이의 부모와 할머니, 오빠들 언니는 억지로 참아야 한다며 뭐든 억지로 할 것을 억지로 하게 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뭐든 참지 않아도 되게 대신 다 해주지도 않았고, 스스로 해내는 것을 기다려줬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신뢰감(trust)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자기 잘난 자신감(confidence)이 아닙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서 서로가 가지는 긍정의 신뢰관계를 말합니다. 부모가 일방으로 제공해주고, 지시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아이의 필요를 일방으로 충족시켜주고, 아이는 아무런 욕구의 표현이 없어도, 아니면 최소한의 표현에 한 치도 놓치지 않고 즉시 주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참기도 하지만, 서로 적절하게 알아주고, 협조하여, 서로 적절하게 만족스러운 관계를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서로 적극이 되고, 서로를 감사하는 관계를 가집니다.

 

이렇게 비롯한 삶의 첫 단계에서 그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도 그런 신뢰의 관계를 맺어갑니다. 자신만 만족하는 관계를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다른 욕구를 가진 남들도 알아주고, 자신의 욕구도 알아듣게 표현합니다. 이 늙은이의 부모님은 뚜렷한 특징을 가진 분들이었지만 두 분 사이에도 서로 자기만을 주장하지 않았고, 이 아이에게도 자기 같이 되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봐주고, 기다리고, 알아주었습니다. 아이는 다른 사람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어 어디서나 주저 없이 자기표현을 할 수 있었고, 또 들어줄 사람들도 알아보고 그들과 같이 삽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선의를 알아보는 감각을 유지하며 살아온 거지요. 삶의 첫 단계부터 ‘혼자’ 똑똑하면 된다는 생각보다 ‘함께’ 사는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와서 젊은 암 치료 전문인을 만나서도 그 전문인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그 면에서는 무지하나 자신의 몸의 느낌은 더 잘 알기에 표현을 멈추지 않습니다. 의사의 전문 판단에 따라 항암치료 한 번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자기 몸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않은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이 치료 면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하면서도, 의사는 억지로 2차 치료로 가지 않고 늙은이가 원하는 ‘면역치료’로 전환해주었습니다. 넉 주간을 지나면서 항암약 효과를 지우고 새로 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늙은이 속은 회복되어가고, 심리학교실과 수요모임을 하면서 제대로 사는 주기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권위자의 말도 구부릴 수 있는 기초신뢰감 덕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소원에 따라 마음을 바꾸시는데, 우리가 어떤 권위자에게 휘둘릴 겁니까? 우리 서로 듣는 귀, 보는 눈, 공감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 이웃과 소통하며 같이 사는 삶을 잃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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