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에 사는 한 아이가 학교 내 폭력을 경험하고 쓴 글을 한 모람이 카페에 올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잔잔하게 쓸 수 있었을까 놀라웠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었는지 짐작하기에 그 아이의 침착한 자세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애초 기초신뢰감이 든든히 갖춰지고, 스스로 자기 조절하는 독자성이 든든했어야 합니다. 놀이시기에 자연 속에서 다양한 동무들과 여러 가지로 실험하며 놀면서 놀이(삶)를 운영해 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앞으로 살아갈 도구와 태도를 갖추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제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아이는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 것인지 자기 정체감을 확실히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른이 되기 전이니 아직 현실에 뛰어들지 않아도 됩니다. 현실에서 부닥칠 문제로 해서 좌절되거나 방해받기 이전이니 아주 이상이 높을 수 있습니다. “현실을 모른다”는 말을 듣더라도 동정심이 많고 정의감이 높을 때입니다. 현실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때(moratorium)라 이런 이상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사는 사회의 이상을 만드는 때입니다. 주머니에 돈을 다 털어 불쌍한 사람에게 주어야 하고, 그러지 않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때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동무를 그대로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양시 한 아이의 글에 등장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명 몸으로 사춘기를 넘기고, 잘 먹고 운동하여 몸은 잘 자랐지만 마음의 사춘기에 갖출 덕목은 갖추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양시 아이들만 그럴까요?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당한 아이만이 아닙니다. 폭력이 진행되는 동안 곁에서 지켜본 동무들 모두 동정심도 정의감도 갖추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통계치로 보면 아마도 우리 청소년의 이런 특징이 ‘정상’이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한 정체감이 만들어지지 않은 겁니다. 정체감 와해(identity diffusion)라 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자기 정체감이 없으면 아이들은 패거리 나누기에 몰두합니다. 어떤 집단에 속해서 자신의 흐려진 정체감을 보충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편과 다른 편 나누기에 예민해집니다. 자신감이 없을수록 집단에 지나치게 동일시하게(overidentify) 되는 겁니다. 섬세하게 자신과 동무들의 상황을 살피지 못합니다. 제대로 자기편(동무) 노릇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볼 줄도 모르고 자기편(동무)으로 구분하여 패를 만들려 합니다. 자기편(동무)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픈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한편 먹습니다. 자기표현을 제대로 적절하게 하지 못하고 혼자 집에 가서 아파합니다. 폭력을 가한 아이도 당하는 아이의 아픔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픔을 당한 그 아이는 늘 ‘아픈 엄마’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혼자 애를 씁니다.
우리 사회가 동정심을 가지지 말라고 아이들을 가르친 결과입니다. 아이들은 공감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춘기를 맞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도덕심을 가져야 할 때에 이르러 아이들에게 전해진 우리네 도덕심은 공감과 정의가 아니라 ‘냉담하고 무심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기를 때 바로 이렇게 무심하게 길렀습니다. 배고픈 것을 알아주는 마음이 없이 밥상만 차려준 겁니다. 아픈 곳을 공감하는 마음으로 보살피지 않고 병원에 데려갑니다. 왜 아프냐고 짜증내지는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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