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분석학에서 청년기의 사랑을 말할 때 성의 만족을 중요하게 다루려 합니다. 사춘기 지나 몸으로 어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해서 자동으로 밀착된 사랑의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이 되기까지의 심리발달의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성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중학생이 초등학생에게 폭행하는 것, 어른이 아이들에게 못 할 짓을 저지르는 것이 몸으로 성행위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고 해도 건강한 사랑을 ‘서로’(mutuality) 같이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발달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미성년자에게 성폭행한 유명 연예인에게 몇 해 감옥살이 시키고 전자 발찌를 몇 해 채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법을 몰라서 검사가 약자인 피의자에게 뇌물로 성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윤리 도덕이 제대로 지켜지려면 엄격한 규율과 법으로 다스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고 성숙해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 되듯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동등한 두 사람 (true twoness)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이기를 원하는 두 사람은 애초부터 완전히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까요. 취향이라든지 자라온 배경이 비슷해서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연히 같은 때 같은 학원에서 재수생으로 등록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공통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과 ‘비슷한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잘 해결해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밀착’과 함께 ‘거리두기’를 잘 해야 합니다.
아, 벌써 골치 아프게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에릭슨이 말하는 청년기에 실패한 덕목 ‘자기 속에 빠지는’ (self-absorption) 몰골을 초래하고 맙니다. 자기 안목으로만 상대를 보려 하고, 사랑하는 이의 속마음을 알아주려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꿈꾸고, 상대의 욕구를 모른 체하는 관계가 얼마나 공평하지 못한 것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남자과 여자가 만나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 평행선을 그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게 되겠지요. 만남이 없이 살게 되지요. 아침 방송에 80대 유명연예인이 12살 아래 아내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해서, 어머니를 잘 모실 여인이라 두 번 만나고 결혼했답니다. 사회하는 젊은이들이 그 부인의 불만, 아쉬움을 듣고 싶어서 묻고 또 자꾸 묻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불만이 없답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아들 넷을 나서 혼자 기른 것이 그냥 당연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병든 남편이 섭생을 잘 따라 해주기만 바란답니다.
그분들은 성공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면서 그 면으로 만족하게 살아온 것이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밀접함’(intimacy)과 ‘거리 둠’(distantiation)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아예 포기하고, 집착하고, 고집부리며 사느라 어려워합니다. 당장은 자기마음가는대로 하는 것이라 골치 아프지 않다고 여길지 모르나 두 사람만의 사랑의 관계를 상처내고 허물어 버리게 됩니다. 많은 연애 소설과 영화가 이런 관계를 미화하여 사랑을 오해하게 합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고 막무가내로 덤벼듭니다. 집착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정말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넘어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이었을까요?
서로 갈등하고, 경쟁도 하면서, 현실과 꿈, 일과 놀이, 사랑과 증오를 나누며 다스리고, 서로 함께 조절하며, 만족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골치 아프더라도 말입니다.) 건강한 성의 만족은 가학할 필요도 없고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야한 동영상이 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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