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양재경(핵 없는 세상 공동대표)
- 입력 2021.01.19 09:36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1986년 4월 26일 새벽 2시 동유럽과 소련의 사이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 있는 핵발전소 4호기가 폭발하여 2,000톤에 이르는 원자로의 덮개가 새벽 2시에 날아가 버렸다. 1,000톤에 가까운 방사성 물질이 건물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4호기와 3호기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14명의 소방대원이 출동했다. 원자로 안에는 원자폭탄 20개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 방사능이 함유된 수천 톤의 흑연이 들어 있었다. 발전소의 노동자들은 원자로가 파괴된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발전소의 소장에게는 원자로가 냉각 중이라고 보고되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 사용된 물이 기화되면서 증기는 지르코늄(Zr)이나 흑연과 반응했다. 그리고 수소 가스 등의 가연성 물질을 만들어 냈다. 이 물질은 오후 9시 40분경 반응로의 잔해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그 불기둥은 50미터에 달했다. 불은 옆의 3호기까지 번졌고 새벽 5시경에 겨우 진압할 수 있었지만, 원자로 내부의 흑연에 붙은 불은 사고 발생 후 9일간 지속되었다. 소장은 이 사고가 심각한 것이 아니기를 바랐고, 모스크바 당국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8시간 후 고르바초프가 보고 받은 것은 ‘발전소의 화재’였지 폭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최초의 소방관 14명을 포함한 28명은 며칠에서 몇 달 이내에 방사능 피폭으로 인하여 모두 사망했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 경보 사이렌 한 번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신화 ‘안전한 원자력’을 믿었다. 주민들은 평화로운 토요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대기중의 방사능 수치는 평균치보다 400배가 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국이 오직 두려워한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진실이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 때는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고 공개는 소련 기술력에 대한 수치라 여겨졌다. 인근 주민들의 동요를 우려해 출동한 군인들에게는 마스크와 보호 장비도 금지되었다.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사고 발생 22시간이 지나도록 인근 국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옆의 벨라루스(백러시아)에서는 오염물질의 대부분인 약 70퍼센트가 벨라루스를 덮쳤다. 사고 다음 날인 4월 27일과 28일에는 평소보다 6배 높은 방사능이 스웨덴을 비롯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과 핀란드, 덴마크 등에서 검출되자 바람의 경로를 추적했다. 결국 소련이 관영 통신을 통해 사고 자체를 인정한 때는 4월 28일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동요가 두려웠던 우크라이나 당국은 5월 전통 축제 참가를 독려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훗날 이 축제에 관한 모든 공식 기록을 삭제했다. 4호기 발전소는 사고 발생 206일 만인 그해 10월에 ‘석관’이라는 콘크리트로 봉인되었다. 2005년 기준으로 청소에 참여했던 50만명 중 2만명은 사망했고, 20만명은 장애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쏟아지는 빗물은 석관 안으로 스며들어가 석관 내부의 습도를 높여 철과 시멘트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들어간 빗물은 다시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오면서 방사능을 건물 밖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 45분, 강도 9.0의 지진이 일본 동북부 해안에서 발생했다. 해안가 마을에는 쓰나미가 밀려 들었다. 최대 높이 15미터에 이르는 파도가 순식간에 삶을 덮쳤다. 그동안 도쿄전력과 일본의 핵공학자들은 발전소 바로 아래서 강도 8.0의 지진이 발생해도 안전한 내진 설계가 되어 있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가장 먼저 폭발이 있었던 1호기에서는 천장의 금속 배관 이음이 어그러지면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오후 4시 36분에 발전소의 모든 전원이 꺼져버렸다. 오후 7시 3분에는 제1발전소의 비상 디젤발전기조차 정지되었다. 냉각이 되지 않으면 압력이 올라가 터져버리거나 연료봉이 녹아버리는 ‘멜트다운’이 된다. 이러한 비상 상황에 대한 대처 경험은 전혀 없었다. 결국 3월 12일 오후 3시 36분 1호기가 폭발했다. 사고 직후인 3월 11일 미국 정부는 원자로 냉각에 대한 기술 지원을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이를 거절했다. 제안된 냉각방법이 발전소의 폐로를 전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1호기는 발전소를 운영하는 회사인 도쿄전력에게 하루 하루의 가동이 순수한 이익을 내는 발전소였다. 도쿄전력은 이 핵발전소가 아까웠다. 따라서 사고가 발생한 발전소에 추가로 냉각수를 투입하고 밸브로 압력을 조정하는 일을 반복했다. 지진 발생 3일 뒤인 3월 14일 3호기가 폭발했다.
3월 15일 오전 6시 10분 2호기의 폭발음이 있다는 NHK 보도가 전파를 탔다. 4호기의 건물에도 8미터짜리 구멍 2개가 뚫려 있었다. 발전소의 지붕 위로 자위대 헬기가 부지런히 오가며 해수를 뿌려댔다. 하지만 자위대는 평소 핵발전소의 폭발에 대한 대응 훈련을 받아온 적이 없었다. 15일까지 자위대는 중앙특수무기방호대 등 200명을 냉각과 오염제거를 위해 핵발전소로 투입하였다. 일본 후생성은 3월 15일 핵발전소 기술자의 피폭 방사선량 법정 한도를 100밀리시버트에서 250밀리시버트로 상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핵발전소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최대 피폭 방사선량의 5배에 이르는 수치였다. 3월 18일 오후 사망자는 6,500명을 넘어섰고, 21일에는 확인된 희생자가 8,000명을 넘어섰다.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 중에 최악의 피해였다. 언론은 멜트다운(노심용해)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기했지만, 도쿄전력이 공식적으로 노심 손상을 인정한 때는 5월 16일이었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냉각수 주입이 중단되는 순간, 단 1시간 만에 온도는 급격히 오르고 건물은 터져버리며 핵연료는 녹아내릴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압력용기 바닥에 쌓인 연료가 외부 용기로 샐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11월 2일 여전히 원자로의 핵연료가 핵분열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011년 4월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는 폐로는 물론 주변의 토양 오염의 제거까지를 감안하면 경우에 따라 100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사진출처 위키백과)
( 여기 내용들의 출처는 다음 책의 본문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책 명 :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 지은이 : 강은주 출판사명 : 아카이브 Archive )
*‘핵없는세상’은 2011년 8월에 창립되었으며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을 계기로 하여 탈핵을 추구하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재경(핵 없는 세상 공동대표) [email protected]
출처 : 콩나물신문(http://www.kong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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