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어떤 욕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 아이들에 대한 소망이 자리 매김합니다. 부모의 시각이 어디에 맞추어있고, 어떻게 삶을 바라보며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는지를 아이들은 나름으로 열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속으로만 생각하고 아이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부모를 오해하기도 합니다. 부모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떳떳하지 못하면 앞뒤가 맞지 않고, 안팎이 달라 모순되게 살게 됩니다. 고3인 딸이 미술을 전공하기로 했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반대하다가 아이에게 졌답니다. 왜 반대했느냐 물었습니다. 돈도 들고 힘들이고 했는데 밥벌이가 될까 걱정이었답니다. 사회학을 한 그 부모는 그런 고민을 안 한 것이었나를 물었습니다. “아, 물론 아니지요.” 돌아온 답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할 때 부모의 삶이 바라는 가치개념이 천차만별일 겁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성에서부터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의 폭을 얼마나 넓게 가지는가에 따라 사는 형태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먹고사는 것이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얼마나 잘 먹고, 많이 먹으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아주 다릅니다. 옷을 입고, 머리를 가릴 집에서 사는 것이 필요하지만 얼마나 비싸고 좋은 옷을 입으려 하는지, 강남같이 어느 지역에 위치한 얼마나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하는지 모두가 다릅니다. 거기에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위치에서 존경받고 싶은 욕심도 가지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한정되지 않은 것을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이 글에 다 포함되지 못한 각양각색의 가치를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바라며 다양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가치라는 삶의 요인들은 아마도 사람의 수만큼 많아서 분류하려 하면 컴퓨터 작업이 필요할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부모인 우리가 자기의 생각에 따른 태도만을 유일한 것이라도 된다는 듯 억지 주장을 폅니다. 공부하는 자세도 엄마만큼 열심히 아니라고 채근합니다. “먹고살기 힘들 것이라”며 길을 막습니다. 아이의 식성과 다른 값나가는 고기를 먹으며 “그 정도로는 먹고살아야 한다”고 기준을 세웁니다.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능력을 엄마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고 거드름도 피웁니다. “나와 한 편이 되어 같이 세상살이에 발벗고 나서 부모의 체면을 살려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부모 위주에서 아이들 목을 조입니다. ‘효자’ ‘효녀’가 되기를 강요합니다. 부모와 달리 사는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냉정하게 ‘효자’ ‘효녀‘이기를 거부해야 할 자리에 아이들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삶의 틀을 찾아 만들어 가는 것을 사랑으로 지켜보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자식 농사라며 “내 아이는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금융실명제를 어기면서 차명으로 재산을 지키고, 어마어마하게 돈을 불리는 사람과 아들의 이름이 뉴스에 매일 오르내립니다. 한때 권력을 가졌고 돈을 쌓아두고 살았을지 몰라도 그를 좋은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부모 말 잘 들어라” 하지 말고 “아이 말 잘 들어서” 아이 뜻을 펴게 해야 합니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 마음을 알아주며, 서로 존중하며, 서로의 뜻을 살피며 살면, 아이가 자기 뜻을 펴며 살면서도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는 ‘효자’ ‘효녀’가 자연스레 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아이들도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으면서 또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과 널리 ‘함께’ 협력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만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우리 모두 탄핵받은 지도자뿐 아니라 그 이전의 지도자들에게서 생생하게 보아왔습니다. 우리 모두 합심해서 자폐아를 양성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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