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른 부모 품에서 자랐습니다. 한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자매가 있어도 자기와 부모 사이의 관계는 또 다릅니다. 자신의 성향이 부모님과 잘 맞아 어울리는 경우에는 좋은 관계를 맺어 순탄하게 살게 됩니다. 자기가 태어났을 때 집안이 망했을 경우도 있고, 집안이 잘 되어 형편이 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같은 부모라도 아이들과 관계가 달라집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누구를 도와줄 것인가? 우리는 평생 살면서 이렇게 이웃과 생소한 사람을 구분하며 익혀갑니다. 집안에서 누가 제일 힘이 센가? 누가 만만한 사람이고 또 불쌍한 사람인가? 때마다 판가름하며 삽니다. 믿을 사람과 믿지 못할 사람을 구분합니다. 돌쟁이 여진이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궁금증을 풀고 싶은 욕구를 알고, 식탁의 높이와 자기의 눈높이도 알고, 걸상을 쓰는 연장 개념도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시를 합니다. 이 할머니가 알아보게 표시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살아온 우리는 자기의 필요와 욕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그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물어보게 됩니다.
아무도 갑자기 아이 때 어른이 되지 못합니다. 삶의 첫 해에 이뤄야 할 과제가 있고 그 다음해, 또 그 다음으로 성취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치한 과제일지 몰라도 적합한 시기에 적합하게 그 과제를 익히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초기 단계가 허술하면 기초가 흔들리고 다음 단계로 오르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허술한 어른으로 살게 됩니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와 세상에 나온 뒤에 겪는 위기감으로부터 우리 모두 온 생을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위기를 맞았고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과제를 풀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적절한 때에 적합하게 극복해왔습니다. 혼자 몸의 발달만으로 해온 것이 아닙니다. 양육하는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과제를 이루어가는 것을 익힙니다.
기초신뢰감은 혼자 하는 활동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자기가 사는 세계, 환경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자기가 대하는 환경, 인간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환경 속에서 그 환경을 맞는 자신이 믿을 만해야 하는 겁니다. 환경과의 관계에 안정감을 갖게 하는 데는 아이를 돌보는 어른들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 어른들에 대한 신뢰감이 자신에 대한 신뢰를 기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태어나 첫 한 해 동안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익히는지 어른들이 모르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 한 해가 건강한 성격 형성에 제일 중요한 때일지 모릅니다. 첫 단추를 잘 꿰야 하듯이 말입니다.
자신이 귀한 존재이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라면 다른 사람을 안심하고 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환경이 되는 다른 사람을 안심하고 대하면서 자신과 환경을 순조롭게 알아가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내면의 욕구와 발달에 법칙에 외면하지 않고, 우호적인 친절한 환경과 끝없이 서로 교섭하면서 그 과정에서 자기답게 적합한 속도로, 적합한 순서로, 적합한 형태로 발달해갑니다.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과 성, 마지막으로 올라온 게임 중독까지 누구나 걸리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 모두를 즐기기 위해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자신이 조절할 수 없고, 그것들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의존의 단계에 이릅니다. 끊을 수 없어지는 단계가 중독입니다. 즐기는 것과 의존하게 되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그 사람에게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내면 상태에 달린 것입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몇 시간 하는지 엄마가 감독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엄마가 자는 동안 아이는 이불 속에 들어가 어두운 데에서도 ‘스마트 전화’의 LED 불빛으로 밤을 새울 수 있습니다. 그 불빛은 잠을 쫓아내는 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