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2강
프로젝트

노랫말에 제일 많이 나오는 낱말이 아마도 ‘사랑’일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무를 즐기는 민족으로 정평이 나있기도 하니 방송국마다 노래 부르고 듣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 당여한가 합니다. 거의가 ‘사랑’ 노래가 불리고 있고, 화면에 비쳐지는 사람들의 얼굴은 ‘사랑’노래에 빠져있는 듯 보입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해마다 새 가수를 발굴해내는 방송 프로 마지막 회를 우연히 보다가 놀랐습니다. 11살 12 살짜리 패가 우승했다 합니다. 그 아이들도 사랑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좋아해 잘 듣는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에 나와 동요를 부를 나이인데 말입니다. 사랑 노래를 좋아하는 데에는 나이가 상관없어 보입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가 유명 가수를 만들려고 돈 들여 학원에 보내고 어른 흉내내기를 훈련했을 것이니 참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빨리 어른의 세계로 밀어넣는 것이 아이들을 제대로 자라고 살게 놔두지 않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어디 가수만일까요? 영재 교육이라 하는 것이 다 아이들에게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요. 아이 때는 그 때에 맞게 자랄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사랑을 제대로 해봤을까요? 감회에 흠뻑 젖은 얼굴을 하고 방청석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 가운데는 부부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들의 연애 시절을 회상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각자 따로 가졌던 사랑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청년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때라 하는데,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성 친구를 사귄다는 말이 나와 어리둥절합니다. 아이 때부터 동영상에 흔하게 노출되고, 성에 빨리 눈뜨고 접하는 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누가 청년기까지 기다리느냐 묻게 되었습니다.

 

몸의 느낌과 몸의 욕구로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반드시 온전히 가까운 마음의 관계를 이룬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주변 흐름에 따라 또래들이 다 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랑을 자기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남녀칠세부동석 (男女七歲不同席)을 믿던 시절의 내 부모님은 뒤따른 자손들의 시대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적합한 때가 되어, 서로 만나, 사랑하며, 평생을 살 것을 자연스레 놔두지 않고, 몹시 더 애쓰게 만든다고 하셨다. 물론 나더러 어머니 같이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 아무 말도 못하고 따라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책임 있는 관계를 맺기에는 갖추어지지 않은 미숙한 자아개념으로 이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청소년기가 안타깝다는 그분들 세대의 관찰이 우리로 생각하게 하는 바가 분명 있습니다.

 

비교적 확실한 자기정체감 (identity)을 갖추기 전에 청소년들이 사랑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래들 사이에 유행같이 떠도는 형태를 따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사랑하는 관계인 줄 아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귀면 같은 반지를 끼고, 만난 지 백일, 천일 되었다고 날짜를 헤아리고, 빼빼로 날, 발렌타인 날, 화이트 데이를 챙깁니다.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의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여자 친구 몇 명을 거쳤다는 것을 업적같이 뽐내는 남자도 생깁니다. 그렇게 남자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풀이 죽는 여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런 문제를 초월한 듯 자기 영역에 매진하기만 하고, 관계를 무시하는 듯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하고 나면 언제고 여(남)자는 많다”는 지론으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며 사는 것을 쉽게 발견합니다. 가까이 부모님부터, 언니네 오빠네 부부, 결혼 한 친구들의 사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려 하는 것이 서로를 소외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두 사람이 계속 건강하게 ‘진정으로 두 사람’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각자가 또 서로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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