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 여성이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먼 길 마다않고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 돕고 가르치고 배우며 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아마도 동무들과 동생과 놀이시기를 잘 지냈나봅니다. 그렇게 삶의 방향은 정해졌는데 그렇게 살기 위해 갖추어져야 할 구체스런 영역과 방법이 막연한 겁니다. 어떤 영역에서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 배우며 사는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든가 사회복지사가 되어야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즐기고, 잘 할 수 있는 영역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즐기며 할 수 있는 것은 싫증나지 않고, 힘들다 하지 않고 할 수 있어 열심히 훈련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 연습하는 ‘하논’도 재미있다던 내 아들 어린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립니다. 역사책을 즐기는 아이는 방구석에서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읽습니다.
오늘이 시인 윤동주가 일본 감옥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며 일흔한 해 전 세상 뜬 날입니다. 그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좋고, 지루하지 않고, 억지로 힘들이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쉽게 쓰여 진 시”라 이름붙인 시도 있으니까요. 동주의 아버지는 동주에게 의사가 되라고 했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보람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주의 시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따스하게 해 주었을까 생각하면 어떤 의사보다 좋은 일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어도 아직도, 그리고 먼 훗날에 이르러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릴 것이니 말입니다.
영화 <동주>에서 문과를 택하면서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려는 동주의 말이 동주답지 않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문과를 나와도 좋은 데 취직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요즘의 관객을 의식한 대본인 것 같았습니다. 상담실을 찾아온 이 글 앞에 말한 여성으로 돌아갑시다. 그 여성은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는 이들의 칭찬을 늘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의 어머니가 그림쟁이는 “배고프게 산다” 했답니다. 영화의 대사와 같은 톤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여기서 길이 갈립니다. 동주는 자기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그 여성은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림그리기를 저버렸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배신한 겁니다. 자신의 느낌, 마음을 스스로 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니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상담실을 찾는 많은 이들이 자기 마음을 몰라 답답하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이 지시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어머니나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살아 버릇해서 자기 마음을 모르게 된 증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늘 “현실에 맞추라”는 겁니다. 취직하고 돈 벌이 하는 것이 ‘현실’이고 자기 마음이 원하는 것은 ‘이상’이라고들 합니다. 그 젊은이가 자기 고민은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자기의 현실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돈벌이가 현실이라고 오해하고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편에 서서 자기의 ‘현실’을 ‘이상’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현실’과 다른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것과 어느 편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고기를 먹지 않는 나더러 “그건 현실이 아니니 고기를 먹는 현실 편에 서서 고기를 먹어야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학령기에 들어서는 세훈이와 영우를 잘 살펴보아 방해하지 않는 어른들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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