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 많은 집에 맏이로 태어난 여성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누나 언니 구실을 의젓하게 잘 해왔습니다. 아이 시절에도 아이 짓거리를 하지 못하고 자랐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도 하지 못합니다. 자기답게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보기도 전에 동생들 생각을 우선해왔습니다. 그건 또 어른들의 눈초리에서 그들의 기대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평생 그렇게 사는 것이 책임을 다 하는 길이고, 사람의 도리라고 여겨, 한 점 부끄럼 없다며 당당했습니다. 마음 깊숙이 숨어있어 자기도 모르는 자기 욕구는 무시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한 책임’일랑 없는 것 취급하며, 오로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았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할 도리를 다 했는데 동생들은 각기 자기 삶을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어떻게 이럴 수가!”기막힌 허탈감에 빠집니다. 쓰디쓴 배신감을 느낍니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뭡니까? 아기 때부터 들어온 말, 놀이 시기쯤에는 이미 동생을 보고 동생과의 관계가 역할로 물들여집니다. “너도 아직 아이야. 동생 걱정은 하지 마! 동생은 어른들이 돌볼 거야.” 라는 어른들의 말은 듣지도 못하고 자랐다 합시다. 어른들이 자기를 아이 보는 도구로 삼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아이라고 봐주고, 아이로 알아주는 참 인간관계를 겪어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겁니다. 맏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서로 봐주는 참 인간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모든 아이들은 어른들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역할과 기능을 이행하는 도구로 살게 됩니다.
이때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기대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학교라는 기구에서 더 얻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또 어른들이 그렇게 만듭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 잘하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훌륭한 사람, 힘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합니다. 어른으로 역할과 기능을 도구로 삼아 힘을 쓰게 되면, 가족 같이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책임지며 살 것이라 머리속에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형제 수만큼 높은 집을 지어서 한 층에 한 가족씩 살고, 엄마 아빠와 같이 살 거라는 포부도 가집니다.
아이들은 이때 여러 가지 놀이 감(장난감) 잘 쓰는 것에 열심입니다. 이미 되어있는 것도 자신에 맞게 변형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을 고안해 냅니다. 한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순식간에 여러 가지로 용도로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이 노는 아이들과도 합의를 볼 줄 알게 됩니다. 자기 구미에 딱 맞는 아이들 하고만 노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놀고 싶은 놀잇이감을 자기 식으로만 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절충하고 합의를 하면서 노는 것을 즐깁니다. 공평하게 놀 줄 아는 아이가 자라서도 공평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어린이 성근이가 수유동 넓은 터에서 교수와 직원 아이들과 뭐든 공평하게 나누며 자랐습니다. 밤을 따고 도토리를 따도 더 많이 딴 아이들이라고 해서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밑에서 구경만 한 제일 작은 아이까지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봅니다.
놀이시기 때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공평하게 알아주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어른들이 알아 지켜주어야 할 것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이 목표인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도 그 길을 따라가게 되면 결국 스스로 힘의 도구이자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한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주변에 이웃인 아이들도 비참해집니다. 아이들의 숫자만큼 다른 아이들을 각각 그 아이 나름의 아이 됨됨이를 속속들이 알아주는 어른이 된다면 어른과 아이도 자유롭고 이웃과도 평화로운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제대로 된 질서를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이른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새롭게 고안해낼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 질서유지 방법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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