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아이의 독자성을 알아주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확실하게 아이의 품위를 지켜주려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아이다운 짓을 비웃거나 심심풀이삼아 놀림거리로 삼으면 터득했던 독자성도 수치와 의심 (shame & doubt)으로 추락합니다. 은유에게 진심으로 “미안해” 했던 동화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고 알아주는 어른이 있어야 자신의 독자성과 더불어 동료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삶을 진전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아이의 짓거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하찮은 일로 넘겨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화가 어른이 기준이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기분에 따라 아이의 행동을 재롱으로 보아 귀엽다고 쓰다듬기도 하고, 기분이 내캐지 않으면 하찮게 넘겨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모든 행동이 심각한 것이어서 제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합니다. “귀엽다”며 모르는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면 아이들을 싫어합니다. 이모들에게 너그럽게 웃어주던 동연이도 이제는 그렇게 헤프게 웃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이른 아이가 쉽게 웃어주지 않는다 해서 “얘는 웃지 않는 아인가 봐요” 나무라듯 이야기하는 어른들이 아이 마음을 몰라주는 겁니다.
아이들의 독자적인 마음에 관한한 무식한 어른들에 휘둘리고 그 어른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아이로 길러지면 아이는 자기표현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입맛을 다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큼 모두 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누구의 장단에나 맞추어 춤을 출 수 없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해도 어느 누구에게인가는 거슬리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때 자기 마음에 따라 한 말이나 행동이지만 뒤돌아보면 언제나 후회를 불러오고 맙니다. 그것이 수치와 의심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똑같이 따라하는 하는 것이 안전한 삶의 방식이라 여깁니다. 독자성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는 겁니다. 자기자신의 마음을 버립니다. 자신의 느낌, 생각, 뜻을 제껴버립니다. 자기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표현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삽니다. 자기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그렇게 살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온 삶의 방식이 엄마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자기만의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를 윽박지릅니다. “너를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재미없는 문제집을 풀기 싫어하는 아이 마음을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문제집을 풀어야 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그 엄마입니다. 중고등학교에 간 다음에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스마트 폰, 컴퓨터 게임, TV 쇼와 얽힌 역사가 그 동안 있었던 겁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기저귀 떼기, 젖떼기, 말배우기, 인사하기 (배꼽 인사하기), 동무들과 오가며 놀기, 어린이집에서 진급하기, 학교생활, 성적표! 아, 시험성적과 등수! 남자(여자)친구, 결혼, 취업, 돈벌이, 밥벌이, 욕심을 더해 출세, 성공... 이 모든 과정에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의 눈초리가 냉혹합니다. 삶의 운동장에서 달리기 하는 아이들은 관중석에 둘러 선 어른들의 눈초리에 짓눌려 전혀 즐길 수 없고 마음이 한없이 무겁습니다. 학원이나 대학 기숙사나, 군대에서도 아이들의 거취를 부모에게 알려 독 안에 든 쥐같이 꼼짝달싹 못하게 합니다.
아이에게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기준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재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아들이고 잔치를 베푸는 어른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냉혹한 재판관 노릇만을 하려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아이들은 독자성을 잃습니다. 아들이 돌아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는 아이는 헛발을 딛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독자성은 어른들이 믿기 나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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