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과 신경계의 발달이 은유의 안정된 자세와 걸음걸이를 만들어주어 우리로 하여금 마음놓고 즐길 수 있게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계단 올라서는 것이 아슬아슬해 보이고 내려설 때는 보고 있는 우리도 덩달아 조심스럽게 발끝이 닫지 않는 절벽이라도 내려서는 듯 우리 몸이 은유를 따라 움직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은유는 엉덩이가 동그라니 기저귀를 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한해 앞선 동화는 기저귀를 떼고 예쁜 속바지를 입습니다. 동화 엄마 표현에 따르면 옷 맵시가 난답니다. 어른들이 이 나이 아이들 양육하는데 큰 고민 가운데 하나가 변 가리는 훈련입니다. 오죽하면 프로이드가 이 시기를 항문기(Anal stage)라고 이름 붙였겠습니까?
은유가 걷고 뛰고 오르고 내리는 근육은 발달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근육, 배설을 조절하는 근육(sphincter)의 발달은 아직 안 되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조되는 쾌감이 연간되어 있습니다. 놔주지 않고 움켜잡는 쾌감과 내버리고 없애버리는 시원한 쾌감입니다. 자기 머리 고무줄이라고 혁빈에게 한 개도 양보하지 않았던 동화가 문순 이모에게 선선히 예쁜 반창고를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줍니다. 아빠를 그리 찾던 은유가 어떤 날엔 아빠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합니다. 장난감을 자기 것이라 모아두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창밖으로 내어던집니다. 움켜잡기와 내버리기 두 가지 욕구와 쾌감을 마음대로 섞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은유가 밤을 가지고 "은유 꺼야!"를 외쳤습니다. 미형 이모가 "너 밤을 좋아하는구나. 다음에 밤 갖다줄까?"합니다. 그런 친절한 이모 말에 은유는 아무 대꾸도 표정의 변화도 없습니다. 밤의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것'에 대한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내 손녀 아샤도 "엄마가 까만 크래욘을 깼어"합니다. 자기도 많이 깼지만 엄마가 자기 것을 부러뜨린 것을 잊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아이가 자기 독자성을 지키려는 발달의 애매한 투쟁과정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긴장'에 대비되는 '내버리는 느긋함'을 번갈아 실험하면서 독자성을 향한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항문기를 강조하는 분석학에서는 항문 주변의 근육의 수축으로 참는 쾌감과 그에 대비되는 근육의 이완으로 얻는 풀려나는 편안함 쾌감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이상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차츰 독자성을 이루게 됩니다. "나" "내 것" "너" "네 것"이 구분 가기 시작합니다. 아직 은유는 "나" "너"로 표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해서 "은유 거" "동연이 거"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쾌감과 '해야 할 것'이 맞아 떨어지는 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할 과업", 그중 하나가 "변소 가서 해야 할 일"을 자기 스스로 하고 싶다는 결정을 아이가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문화마다 변 가리기 훈련과 개념이 다릅니다. 형제들이 많고 대가족 안에서 자랄 때에는 자연스레 큰 아이들을 따라 작은 아이가 배우고 익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청소하기 편리한 온돌에서 아기의 일 처리는 부담스럽지 않기도 했을 겁니다. 핵가족이 되면서 부모가 아이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여기게 되어 부담이 커진 겁니다. 서구화되면서 깨끗하고 냄새나서는 안되는 삶의 공간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는 지나치게 청결 강박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강박의 신경증세가 보이거나, 변비증세가 심해지는 것도 연관이 됩니다.
아이마다 몸의 발달이 다르기에 어른과 아이가 서로 잘 알아가고 협력해가야 하는 어려운 과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너무 일찍 심하게 훈련하는 것이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아이가 스스로 차츰 조절할 수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실패감을 맛보게 될 수 있기도 하고,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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