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이들이 늙기를 싫어합니다. 마냥 젊게 살고 싶어 합니다. 늙은이가 되어 사는 것이 좋다고 하면 믿을 수 없어합니다. “정말이요?” 하는 얼굴로 “어떻게, 무엇이 좋은가?” 묻습니다. 서정주의 싯귀를 읊을 때는 너무 젊은 때여서 그냥 건성이었나 봅니다. 평생을 살아온 삶의 굴레에서 이제 마지막 단계에 올라서 지나온 뒤안길을 돌아보는 때를 잔잔하게 기뻐하기만 하면 되는데 아마도 아직도 미진해서인가 봅니다. 이제는 늘 바쁘지 않아도 됩니다. 뭔가 쉬지 않고 움직여야하지도 않습니다. 열을 올리고 분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뜻대로 하려고 억지 부리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손에 움켜쥐고 놓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곱게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갓난 아기로 앞 세대, 부모의 품에서 보호받으며 자라던 때부터 자기가 부모가 되어 다음세대를 기르고, 이제는 그 열매를 서서히 수확하는 때입니다. 앞선 일곱 단계 마다 걸맞는 성장을 통해 각각의 덕목을 (기초신뢰감, 독자성, 솔선, 열심, 정체성, 친밀감, 생산) 다 갖추고 나면 “다 이루었다”는 흐뭇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들쑥날쑥 자라고 바뀌면서 때로는 아프고, 실망하기도 하면서도 긴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단련하고 적응해온 것입니다. 손등과 팔뚝에 생긴 거뭇한 기미는 모두 요리하며 튀긴 기름이나 다림질하며 덴 눈에 보이는 자국입니다. 표백해서 말끔한 피부를 자랑하기보다 주름진 늙은 살결로 당당히 승리한 표적입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일을 해내고, 사람을 기르고, 생각을 만들어내고, 전통을 쌓아온 것입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자기만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삶이 있고, 아무도 자신을 대치할 수 없는 자신의 지난 날을 완성하는 지점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온전히 용납합니다. 온전한 자기통합이고 성실과 온전함 (Integrity)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불을 밝히고 찾아보려 해도 우리 현실에서는 이렇게 만족스러워 하는 늙은이들을 만나기 힘듭니다. 전철에서 큰소리로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만 합니다.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면서도 앞 세대와 다음 세대와도 동지애를 가지고 존중하는 품을 가지지 못한 탓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아 자기만을 주장해온 탓입니다. 아무도 혼자 설 수 없는 인생길에서 자기의 입맛만을 고집해온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입니다. 늙은이가 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오지 않았으면 이제 와서 다른 입맛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만 부립니다. 민주주의 이상을 지키겠다고 촛불 시위하는 젊은이들의 소리를 꺾으려고 더 크게 확성기를 틀어 맞불 놓는 사람들은 늙은이 집단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용납하는 아량과 여유를 늙은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다름을 서로 존중하는 것을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다음 세대도 관용의 태도를 배울 길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버릇없다 하기 전에 들어주고 이해하고 받아주는 자세는 윗세대가 갖추어야 할 태도입니다. 늙은이들도 한때 젊은이였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아직 늙은이가 되어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용납되기를 기대하기보다 젊은이들을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시간 (나이)의 차이를 뛰어넘는 동지 되기, 벗 삼기의 맛을 알고 실제로 해보면 인생의 마지막 단계가 슬프기만 하거나 (Dispair) 혐오스럽지 (Disgust) 않게 됩니다.
우리 모임에서 제일 나이 많은 늙은이로 젊은이들과 어울려 활기차게 살면서 젊은이들에게 고마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렇듯 늘그막에 ‘팔자 좋은 할머니’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많이 들어주었기 때문에 주어진 복입니다. 오늘 첫돌 맞은 은유도 이 할머니를 보기만 하면 팔을 내밉니다. 할머니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자기도 할머니를 좋아한다는 표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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