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오후 한 사람씩 상담하고 녹초가 되어서 집에 가자 쓰러져 우선 잠을 잡니다. 남편이 어떤 사람들을 만났냐고 묻습니다. 맏딸로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완수하느라 자기는 정작 모두 검정고시로 점철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고 허우대만 이야기합니다. 나를 믿고 상담한 사람이니 그의 속사정은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인 줄 알아 내가 입을 뻥긋도 하지 않을 걸 아니 남편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감탄합니다. 그 여성만이 아니지요. 상담실에서 만난 어느 누구도 대단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번듯한 직업이 있고, 믿음직한 남편과 잘 자라준 아이들과 손주들 재롱까지 즐기며 사는 남부럽지 않은 모양새를 갖추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마음은 삭막하고, ‘혼자’임을 뼛속까지 시리게 느끼면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왔다는 것을 봅니다. 삶의 마지막 자리에서 남편을 닮은 손자의 문안을 받으며 “얘가 나를 얼마나 모르고 있을까!”를 생각하는 90노인을 그린 소설을 떠올립니다. 내 생각을 글로도 쓰고, 말로도 표현하면서 살아온 사람인 나, 문은희도 얼마나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사춘기가 갑자기 자기정체감을 만들게 하지 못합니다. 목소리가 변한 원석이를 엊그제 오랜만에 보면서 자기답게 사는 것에 대한 정체감이 생겼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자기만의 머리 모양을 하고, 모자를 꾹 눌러쓰고, 될 수 있는 한 말을 아끼면서,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귀가 나쁜 내 남편이 자동차 앞자리에서 뒤에 앉은 원석의 대꾸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원석이는 자기 목소리를 돋울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도 원석이는 고전 음악을 사랑하고, 열심히 원하는 악보를 같이 구하려 다니는 엄마가 있고, 아들의 음악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보아주는 아빠도 있습니다. 사춘기를 먼저 거친 두 살 위 누나가 동생이 원하는 여유공간을 알아줍니다. 조급해하는 엄마를 기다리라 소매 자락을 당깁니다.
그리고 문순 이모가 있어서 “너 혼자가 아니야” “서로 알아주어야 할 이웃이 있으니 외면하지 말자” 자극을 줍니다. 자기의 정체감을 가지기 위해 아이들은 주변의 눈과 귀와 마음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천방지축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성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잘못이라 교훈하려 들고, 화를 내는 이웃만 있으면 아이는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숨어버리고 맙니다. 도망가서 평생 후회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런 척하는” 이중성을 익히게 됩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대단하게 된” 여성들을 상담실에서 만나 그들과 함께 예외 없이 인정하게 되는 것은 자라온 과정에서 이런 도움을 줄 눈, 귀, 마음을 지닌 이웃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도 혼자 자랄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 그리고 판단과 행동을 알아주는 어른이 꼭 필요한 것인데 태어나 애초부터 그 필수 요인이 결핍되었던 겁니다. 자기들이 그 결핍증 환자이면서 어른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화내고 아이를 문제아로 낙인찍습니다. 힘을 가진 어른들이 민주체재라 이름 걸고도 횡포를 부립니다.
여기 알트루사에서는 이제라도 사춘기를 잘 거쳐 자기답게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며 지내려 하는 곳입니다. 잘잘못을 재단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마음 바뀜이 소중한 곳입니다. 웬 변덕이냐 하지 않습니다. 상담실 안에서 만이 아니라 재미있는 학교에서, 아잘사 모임에서, 심리학 교실에서, 자활 회의에서, 이사회에서, 점심 먹으며, 노래하며, 뜨개질 하며, 목욕봉사하며, 성경공부시간에, 여기 집단상담 시간에 마음을 바꿀 권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깨달음이라 여기니 마음 바꾸는 것에 감격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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