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마을에서 하는 같이 책 읽고 나누는 모임에 얼마 전부터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저녁 때 만나 김밥을 먹으며 서너 시간 한 달 지난 이야기와 지역 이야기를 하고, 읽은 책 이야기를 합니다. 오는 해가 3.1 독립만세운동 백 주년이라 그때 인물들의 책을 매 달 한 권씩 읽기로 했습니다. 손병희 선생을 시작으로 서재필 선생을 거쳐 지난 번에는 백범을 읽었습니다. 발표하는 사람이 백범의 명언이라고 발표요지 끝에 한 쪽을 달아와 같이 읽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 구절이 제게 딱 걸렸습니다.
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고,
나이 들면 나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으며,
늙고 나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다.
백범은 훌륭한 분이셨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이야기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늙은이를 비참하게 여긴 생각에 박수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한 아기 때부터 우리는 누구나 삶의 시기마다 그 특징을 지니고 살면서, 다른 시기의 사람들과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과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가치있는 사람이고 알아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없고 갖춘 것 없는 사람이 무시되어서는 건강한 세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늙은이들이 스스로 가장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걸음이 느려서 뒤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움직이며, 서둘러 빨리 걷는 사람이 놓치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바삐 사느라 살핌을 받지 못하고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습니다. 서로 안색을 살펴 따스한 위로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늙어 늙은이다운 자신의 품위를 지킬 수 있어야 하는 늙은이에게 책임이 돌아옵니다. 젊은이들에게 무시당했다며 서글퍼하고 분노하기보다 스스로 늙은이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내 조카 가운데 하나가 연기자(배우)입니다. 어려서부터 귀엽고 늘 밝은 아이라서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남들 비숫하게 대기업에 들어가 일을 곧잘 하더니 연극하는 길에 들어서고 영화에도 나오고, 한때는 TV 광고에까지 얼굴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뜸해졌습니다. 정치구도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 아이(?)도 육십을 넘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모든 방송극과 영화뿐 아니라 온갖 소비생활과 문화는 젊은이들을 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주인공은 모두 20대이니 주인공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늙은이의 인구는 늘어간다고 보도합니다.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워진다고 아우성입니다. 고려장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웅얼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가 혼자 시골집을 지키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양노원에 병든 아버지를 보내놓고 연락을 끊습니다, (현대판 ‘고려장’ 아닌가요?)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늘어나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늙은이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의 젊은이도 빼놓지 않고 모두가 늙은이가 될 텐데 늙으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평생을 아이들 기르며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거기서 놓여난 ‘늙은 니’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봄 끝내고 되찾은 자기 자신...날개 편 ‘할머니 작가’들”이라는 제목이 눈에 띕니다. 늙은이 되기까지 돌봄의 역할을 해내고 ‘자기답게 살아낸’ 니들이 소중한 ‘지난 날’과 그만큼 소중한 ‘늙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되찾은 자기자신”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돌보던 때도 그때대로 자기자신이 살고, 그때의 과업을 잘 해낸 때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모두 책을 내는 작가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다운 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풍성하고 다양한 <늙은이 문화>가 꽃피고 그 문화를 모든 나이의 시민들이 즐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되면 내 조카도 ‘늙은이 주역’을 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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