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고 노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무시하곤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아이는 착하고 좋은 아이이고, 노는 아이는 철없이 시간을 허투로 보내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노는 아이의 앞날은 한심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놀게 한다 해도 어른들이 물샐 틈 없이 짜놓은 계획에 따라 ‘교육적으로’ 놀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기 교육을 잘 한다는 이른바 좋은 엄마들이 굳게 믿는 풍조입니다. 그러려니 돈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부모는 돈 벌기에 혈안이 되고, 정작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지켜보려하지 않습니다. 놀이전문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마니까요.
이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른 부모들은 자녀들 중에 박사학위 받은 아이들은 자랑스럽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창피하다고 여깁니다. 혼자 하는 공부만 잘 한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같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자기 성취만을 뽐내는 사람보다 훨씬 사람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복됨을 질투하지 않고, 적어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즐기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삶의 이런 면을 제대로 키워주는 때가 놀이 시기입니다. 형제자매 사이의 관계가 삭막해지지 않고, 이웃을 보살피고, 우리가 같이 사는 세상을 재미있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연습을 하는 때가 놀이시기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놀이기구를 사주고, 놀이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데려간다고 해서 충분히 될 일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놀이 틀’에 맞추게 해서는 아이들 스스로 솔선해서 놀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솔선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그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가 살 인간관계도 스스로 택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살아갈 그들의 세상을 솔선해서 만들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어진 것을 수동으로 하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상황에서 자신이 적극으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지도자 탓, 남 탓만 하며 살게 됩니다. 부부싸움의 이유는 온전히 남편에게 있다고 여기고 이혼하고 싶은 마음도 남편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 니는 그렇게 된 것을 찾으려면 너덧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 나이 먹어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웬수같은 남자’를 만나서도 아닙니다.
독자성의 문제를 해결한 아이는 이제 새로운 과제를 풀어야 합니다. “앞으로 어른이 되어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가 이때 풀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일 가까이에서 아이는 눈앞에 있는 부모를 봅니다. 부모 같이 되려는 마음이 제일 가깝게 생깁니다. 부모가 익숙하기도 하고, 어른으로 힘이 있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좋은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위험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흉내도 내고 동일시하며 부모같이 실험하듯 놀아봅니다. 동화가 인형이나 동생 동연이에게 엄마 같이 야단도 쳐보고 귀여워도 해봅니다. 내 손녀 아샤는 아빠의 기타와 앰프를 다뤄보고 싶어합니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안고 하듯이 곰을 안고 쓰다듬고 귀여워합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부모에 멈추지 않습니다. 우선 근육의 발달로 움직임의 반경이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스카이프 할 때 아샤 애비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작년 6월 23일에 (아샤가 16개월 넘었을 때) 아이가 쏜살같이 자기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어느새 찻길에도 들어서고, 공원에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움직임의 속도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넓은 공원에서 아이가 멀리 떨어져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게 보이는 사진이 앨범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해서 아이들을 품에 안고만 다닌다던가, 개목에 건 개 끈같이 아이 몸통을 매고 어른들이 적당히 늦추거나 잡아당기며 아이의 놀이 폭을 어른들 마음대로 어른에 맞추어 조절한다면 아이의 세상은 좁아집니다. 스스로 탐험할 기회를 아이들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다른 세상에서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고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장래를 마음대로 정하려 합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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