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품에 안겨 사랑을 받으며 자기를 그대로 받아주고 알아주며 돌봐주는 어른들 덕에 마음 놓고 자란 첫해에 ‘기초 신뢰감’이 든든히 자랐습니다. 혼자 서서 걸어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키운 둘째 셋째 해에 ‘독자성’이 강해졌습니다. 그 다음 학교 가기 전 말도 능해지고, 마음 먹은대로 몸도 잘 조절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놀기 좋았던지요. 주변의 자연환경과 동무들과 형, 누나들과 상상을 다 동원해서 온갖 놀이를 만들고 실험하고 협동하고 운영해보았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솔선’해서 놀아보았습니다. 얼마나 원없이 놀아보았는지,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날들이 겁나지 않고 재미있게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이 생깁니다.
이렇게 이때까지 잘 지나고 잘 자란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미 아이들은 자신과 어른(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든든한 믿음이 있고, 스스로 해가려는 의지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알아가는 학습을 주도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학교에서는 아이의 특성과 아이가 가진 자원과 능력이 잘 자라고 생생하게 살아나게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는 이미 열심히 할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함’과 ‘열심히 하는 것’의 덕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네 학교가 그렇게 아이를 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와서 익혀야 할 글읽기를 이미 다 놀이시기에 놀지 못하고 배워온 것을 전제로 해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스스로 열심히 할 필요가 사라집니다. 재미를 잃습니다. <재미있는 학교>가 아닙니다. 교실에서 선생들은 애초부터 아이들의 독자성을 꺾고 시작합니다. 선생님의 지시를 잘 따르는 수동의 자세만을 요구합니다. 솔선해서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할 기분이 들지 않게 합니다. 아이들이 솔선해서 찾아가는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어른 선생이 모든 것을 제공하고 어른 선생이 원하는 틀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 마음을 버리고 질질 끌려갑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엄마들도 “선생님 말 잘 들어라” 합니다.
자신과 어른을 신뢰하고, 스스로 할 독자성을 갖춘 아이들, 그리고 놀이시기에 몸과 마음을 활발하게 발달시켜온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 학교는 이런 아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은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운동장 수업이라면서, 아이들을 똑바로 줄 서있으라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무리입니다. 게다가 마이크에 대고 “앉아!” “서!” 소리 지를 때마다 아이들이 앉고, 서는 것의 의미를 아이는 알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학교에 다녀야 하나?” 깊이 의문하게 되고 묻습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모든 과정이 아이에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질문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아이는 곧 알게 됩니다. 질문해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멈춘 것입니다. 머리(마음)를 쓰면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알고 싶어하게 되고, 당연히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건강한 아이들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지 않고 멈추게 해 놓고는 “착하다” “보기 좋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주 멈춘 것이 죽음의 상태라는 것을 어른들은 모르나 봅니다. 아이의 마음의 싻을 짓밟아 뭉개버린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른이 되어 이웃들과 잘 어울려 협력하며 살면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훈련받는 시기라고 해서 ‘죽기 살기 식’으로 훈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재미있게 아이들이 솔선해서 익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모르나 봅니다. 이른 아침, 0교시 부터 오후 5시까지 닦달하고도 모자라서 자율 학습에다, 학원에다, 숨쉴 틈 없이 아이들을 뺑뺑 돌려봐야 어지럽기만 합니다. 낮잠 자는 것이 얼마나 기억력에 좋은 것인지, 멍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사고력을 높이는지, 뛰어 노는 시간이 길면 얼마나 집중력이 강해지는지 어른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호모 루덴스’ (노는 인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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