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안아주기 좋아하는 항심 이모에게 안겨있어도 얼굴을 돌리면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아는 윤지는 마음 편안합니다. 언제고 엄마는 자기 곁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어서입니다. 필요하면 엄마에게 다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든든하기 때문에 다른 이모들 품도 실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사경회 때문에 하루 종일 아빠와만 있게 된 아이는 집에 돌아온 엄마들 잠시 미심쩍어합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 엄마를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엄마가 자기를 두고 어디 갈 수 있다는 불신이 생긴 겁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반복하면 아이는 믿음을 잃고 평안히 잠자기 힘들어합니다. 엄마에 대한 믿음이 회복될 때까지 엄마가 신뢰감을 되살려놔야 합니다.
믿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늘 곁에 있다는 확신이고, 그래야 언제고 그 사람을 느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엄마가 아이 곁에 늘 몸으로 있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딴 생각하고, 아이 곁에서 딴 짓 하고 있고, 엄마가 욕구불만에 젖어있는 상태에 머물러있으면 아이와 마음으로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상이몽인 부부가 딴 마음 품고 있으면 어떻게 서로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엄마와 아이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기르는 것이 엄마에게 어떤 다른 일보다 우선이 아닐 때 아이는 엄마의 몸짓과 표정을 (귀신같이) 알아버립니다. 돈벌이가 우선인 경우,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살림이 엄마 머리 앞자리를 차지하는 경우, 자기 성취가 우선인 부모, 세상의 이목이 앞서는 사람들, 때로는 신앙생활이 먼저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엄마를 온전히 믿고 있으면 불안함 없이 앞날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어려운 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가 닥칠지라도 뭐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겁내지 않고 자기 뜻을 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고, 낙관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관론자가 뭐든 안 될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아무런 확신이 없어, 눈치만 보며 선뜻 나서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낙관론자는 어려움과 위험이 닥칠지라도,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될 때 힘을 잃지 않고, 나서서 힘을 바쳐 노력할 것입니다. “넘어질라 뛰지 말자” 하지 않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툭툭 털고 뛰어보자” 하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남들이 안전하다고 하는 길만을 따라 걷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 모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따라 하는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을 확률이 높고, 그러면 지지부진하게 되고, 흥미를 잃어 삶의 재미를 잃게 합니다. “재미로 학교 가니?” 했던 친구가 기억납니다. “재미있는 일만 하니?”로 진전될 참이고, 그러면 사는 재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네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게 되고, 친구를 괴롭히며 엉뚱하게 재미를 느껴보려 애쓰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떳떳한 자신의 방도를 자랑스레 보여주지 못하고 온갖 ‘잡 것’에서 재미를 맛보려 합니다. 주어진 틀 속에서 모범생이었던 사람들은 착실한(?) 주부들로 살면서 재미도 주어진 틀에서 찾으려 합니다. 지방자치 덕에 곳곳에 생긴 교양 교육 프로그램에는 이런 주부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룹니다. 모범생이 해왔듯이 모범 주부들이 하는 것은 주어진 교육 내용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합니다.
자기만의 삶을 개척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데, 교양강좌를 가르치는 사람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배운 것이 많다”며 만족을 표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이미 만들어져있는 직업군에 편입해서 그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일꾼’(노예)이 되어 살아가게 합니다. 힘들어도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게 됩니다. 주어진 것을 암기하고 재생하는 데 멈추지 않고, 자기 생각의 틀을 키우고, 바꾸고, 넓히고, 높고 깊게 하고, 새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자기만의 새로운 삶을 창조할 기회를 흘려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이제부터라도 인생의 첫 시기를 소중하게 맞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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