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기 힘들어하는 나에게 로봇 청소기를 써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바로 어제 받았습니다. 점점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우리는 자신의 힘을 덜 쓰고 살 수 있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부터 알트루사가 있는 계동까지 걸어올 필요도 없어 힘과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습니다. 컴퓨터 기술로 무겁고 두꺼운 사전을 들고 단어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화면에 알고 싶은 정보가 절로 떠오릅니다. 우리 머리와 손발을 동원하여 힘들여 이루어내던 일을 이젠 최소한의 시간과 힘을 들여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몸과 마음을 덜 써서 편하게 사는 것이 좋기만 할까요? 여러 갈래로 확 터놓은 길을 차로 달리지 않으면, 열린 문으로 들어서 빈 자리가 있어 앉아 책을 읽거나 뜨개질 하고 있으면 저절로 안국역에 오게 되는 전철을 감사합니다. 꾸벅 졸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걸어온다 치면 우린 어떤 경험을 할까요? 눈 비 오는 날이면 어떤 감각을 가지게 될까요? 햇빛 쨍쨍한 날이면? 구름 낀 날 하늘과 산을, 그리고 그뿐인가요? 네 계절과 또 하루하루, 매순간의 다른 정취를 어찌 다 이 짧은 글에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아침 해를 안고 가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오는 길에설랑 그날 상담실에서 만난 속속 다른 사연들을 실은 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걷는 내 몸과 마음의 ‘아하!’ 새삼스런 감격의 눈뜸도 간편하게 표현하기 힘들 겁니다. 꼬기꼬기 손때 묻은 사전을 시간 들여 찾는 동안 철자의 순서도 익히고, 앞뒤 두루 다른 낱말도 들여다보게 되어 딱 한 낱말만 과녁삼아 “그래 그거야!” 하고 간단히 매몰지게 끝내지 않게 되는 미련과 연상과 확장의 체험을 하게 될 겁니다.
앞 세기 초에 겪으셨을 우리 부모님의 사춘기와 우리를 거쳐 오늘 청소녀들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다를까요? 중요한 주변 요인들이 자기 삶과 다 이래저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사는 삶의 현장에서 가지게 되는 자기 정체감의 풍성함은 오늘의 아이들이 짐작도 못할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기계의 영향력에 갇혀있을 뿐입니다. 손쉽게 재빨리 잡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융통성있는 우주적 정체감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EBS 다큐 프로그램에서 ‘학교 가는 길’을 보면서 느낀 거지만 왜 먼 등굣길을 차로 데려다주지 않고 아이들끼리 걸어가게 하는지 이런 뜻이 있었음을 깨달아 알게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상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삶에 중요한 요인을 비좁게 생각하고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는 태도를 우리가 조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체감이 제대로 건강하게 성립되지 않은 사춘기 아이들이 패거리를 만들고, 사소한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사귐의 범위에서 따돌리고, 제거하고, 괴롭히기까지 하는 미숙한 자세로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공공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그 패거리 틈에서, 그 한계 안에서만 살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이제, 여기, 우리 모두 당황하고 우울해하고 있지만, 그 문제를 풀어가는 것조차도 여러 가지 요인을 놓치지 않고 해결하고, 진전해 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좁디좁은 마음으로 자기 틀에 맞는, 자기 패거리에 이득이 될 것만을 위해 애를 쓰고, 꾀를 내고 있습니다. 말은 거창하게 “나라를 위해”라고 합니다. 건강한 정체감에 대한 자각이 없는 어린 백성들은 데모도 해보고, 성명서도 내지만 어찌 돌아갈지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정체감 확립하고 협력하며 함께 사는 법을 익힐 수 있게 어른들이 정신차려야 합니다. 우리 세상의 앞날이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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