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마다 광화문에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같은 구호를 외치는 소리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힘을 발휘합니다. 매번 기록을 깨는 그 큰 무리가 한마음일까 생각합니다. 당장 물러나기를 원하는 목표는 같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각기 다른 속도가 마음 편하고, 각기 다른 세기로 평등 평화를 구하고, 각기 다른 결의 삶을 추구할 겁니다. 앞에 선 낯선 남자와 같이 세월호 뮤지컬에 눈물을 훔치고, 그곳에서도 교제를 멈추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백칠십만 동포들 수만큼 다른 마음을 지니고 있는 제각각의 사람들이 동지가 되어 함께 움직이며 사는 현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늘 이렇게 저마다 다른 사람과 뜻을 같이 하며 함께 삽니다. 그러기에 자기다움을 지니고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알면서도, 이해하고 용납하며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오히려 “아, 재미있어!” 하면서 지루함 없이 서로의 차이를 축하하며 같이 살 수 있습니다. “너는 왜 나와 달라?”하고 시비 걸지도 않고 “나는 네가 모르는 면이 있는데 들키면 안 되는데!”하며 숨기고 방어하지도 않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남다른 것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니, 자기만의 정체감을 지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생존방식이 어딘가 든든해 보이는 것에 매달립니다. 속이 허전하니 단단한 갑각류가 되어보려 합니다. 에릭슨은 그것을 “일시 감정으로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temporarily overidentify) 것”이라 했습니다. 사춘기에 나름 영웅으로 삼은 사람이나, 패거리나, 군중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치우치게 자기편에 충성하는 깡패가 되기도 하고, 아주 참을성 없이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제외시키는 데 아주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겉껍질이 단단할 뿐 속은 허술합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지내면 이것이 일시 사춘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깨들의 패거리가 존속하고 있고, ‘아무개 사(랑하는)모(임)’ 같은 것들도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하라는 것을 자기 판단 없이 따라 하기만 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그것을 이용해서 선거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떤 나라는 그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를 막은 나라도 있습니다. 엊저녁 뉴스에서 오스트리아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점점 그런 추세로 돌아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이전에 자신의 특성과 욕구를 알고 인정하면서,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다른 사람과 함께 적절하게 조절하며 훈련을 쌓는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하게 되고, 바깥에 목숨을 거는 이런 불행한 현상이 생깁니다. 바깥 환경도 현실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기의 어느 나이에 잠정으로 파악한 것을 확신하고 고집스럽게 우상을 삼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자기의 믿음과 도덕률을 설정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항상 그에 빗대어 보아 엄격하게 판단하려 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공평하게 판단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갈등을 인정할 수 없어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자기 삶의 가까운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가족들)은 자기 틀로 마음껏 재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늘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거느릴 가족이 없거나 약한 사람은 늘 피해망상에 빠집니다.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이 다른 것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그 나쁜 사람이 힘을 가지고 자기를 해치려 한다고 여깁니다. 과거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고 혼자 생각했다면 그 인물이 다른 상황에서도 또 해를 끼치려 한다는 자기 생각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자기자신의 잘못된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꾸어 될 일이 아닙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