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를 산책하다가 예쁘게 꾸민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쉽게 만납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에 그들끼리 마주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개에 대한 마음이 각별한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느낌이 있어서 개 주인끼리도 서로 호감이 있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어쩌다 만난 개들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멈추어 오래 관찰하지 않더라도 곧 눈치챌 수 있습니다, 과부 설음 과부가 알아주듯 말입니다. 목줄로 잡힌 사람 (주인) 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마음껏 껑충 뛰며, 서로 냄새 킁킁 맡으며, 서로 혀로 쓰다듬어주며, 뒹굴었을 것입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의 간섭이 없으면 “개는 개끼리 잘 살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에게 목이 매여있기에 개들만큼도 서로 만나 반가워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개들은 자기와 비슷한 종류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개들보다 낯가림을 더 많이 합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확연히 구분합니다. 확실히 서로 차별합니다. 옷차림으로? 서로 풍기는 분위기로? 안면이 있고 없음으로? 나이를 가늠해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값으로? 말하는 어투로? 서로 복잡하게 계산하는 뇌세포의 바쁜 움직임이 불꽃이 튕깁니다.
누가 그렇게 피곤하게 살라고 가르쳐주었을까요? 물론 아주 심각하게 상처받은 과거 경험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흔적 때문에 그럴 만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아 온 사람들도 낯가림하기는 마찬가지인 듯이 보입니다. 특별히 부족할 것 없이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경우를 수없이 봅니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세요>라는 동요가 오죽하면 그리 널리 불리게 될까요. 그런 말을 들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다니 ‘개 끈’ (아니 ‘사람 끈’이라 해야겠지요)으로 목에 매이고 누군가 잡아당기거나 늦추어 주는 것에 따라 뭔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부모나 어른들은 아이들을 믿고 두면 걷잡을 수 없이 허튼 짓하고, 마구잡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아이들을 잘못했다고 야단쳐야 아이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잘못하기 전부터 잘못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는 듯이 악담을 합니다. 아이에 비하면 부모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무르는 관계에서 일방으로 당하고 산다고 생각해봅시다. 걱정과 초조로 잘 되지 않을 거라는 전제로 아이를 다스리는 부모 품에서 자란 아이가 스스로 자기 뜻대로 사는 문제를 풀어낼 수 없습니다. 기본 의식주 삶의 필요한 영역에서 욕구불만이 없었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과 무식이 문제였다고들 하는 경우를 보지만, 실은 그보다 ‘사람관계, 사회관계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부모-아이의 관계의 의미가 건강하게 확실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늘 생생하게 살리며 산다면, 밤낮없이 바쁘게 채소장사를 하고 있어도, 아이들은 가방끈 짧은 부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마음을 느끼고, 부모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잘 알아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상담했지만 이 니 같이 첫 만남에서 우리 모임에 회비를 내서 적극참여를 약속한 분은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회비를 낸다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되기까지 삶의 의미를 알고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고 그 출발은 인생의 첫 단계부터 사회관계의 의미를 확실히 하는 데에서 싹이 트는 것입니다.
오지랖 넓은 것을 흉으로 여기고 똑똑하게 자기 앞가림만 잘 하라고 하는 것은 결코 똑똑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경우가 없을 허사입니다. 뿔뿔이 똑똑하다는 아이를 길러내서, 이제, 여기, 우리는 제자의 논문을 훔칠 뿐 아니라 연구비도 빼먹는 사람을 교육 수장으로 지명하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내가 만난 한 여성이 오히려 책임있고, 존경받을 교육수장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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