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라 출마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뜨겁게 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은근히 자신의 다름을 내비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의를 갖추지 않고 내뱉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 감정이 왈칵 올라와서 얼굴이 뒤틀리고 엉클어지면서 눈물에 젖어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힘들어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감정표현하면서 평생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삶의 첫 한 해에 다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혼자 밀림에 태어나 동물들과 같이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관계에서 처신할 모양새의 이른 형태는 이때 흔적으로 이미 생겨납니다.
자기 마음껏 할 것을 부추긴 부모 품에 자란 사람은 뭐든 거침없이 표현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표현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시끄러울까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 막히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외면하고 맙니다.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의 뜻을 조절하지 않고 충돌합니다. 피하거나 충돌하는 방식 이외에는 익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초신뢰감을 키우는 아기를 봅시다. 아기는 엄마를 열심히 봐줍니다. 그런 아이를 엄마가 열심히 봐줍니다. 서로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익히는 것은 엄마에 맞추어 자기욕구를 참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엄마가 봐줄 것을 믿기에 자기의 필요를 소리로나 표정으로 요구하게 됩니다.
월요일 아침 동연이를 상위에 자리 펴고 눕혔습니다. 바닥에 눕히기도 하지만 더 넓게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오른쪽으로만 얼굴을 돌리는 경향이 있어서, 또 천정만 보기보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게 엎드려 놓았습니다. 이 '엎드려 뻗쳐' 자세가 힘들었을 겁니다. 얼마 동안 아무 소리 없다가 조금 지내 낑낑대기 시작합니다. 점점 소리를 크게 냅니다. “힘들다”는 표시를 합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좀 더 높이 얼굴을 치켜듭니다. 그러니 깔린 포대기 무늬만 보던 데서 시야가 넓어집니다.
아이의 환경인 어른들이 마음대로 아이를 조절하려 해도 안 되지만 아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도 아이의 기초신뢰감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전통의 교육이 지나치게 어른 중심이었기 때문에 문제였다고 여겨서 새 교육은 아이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중심이 아이 멋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육(환경)이 아이와 협력하는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신뢰와 바깥 (어른, 교육)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 자신이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정당하다고 믿어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적극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의 표현을 알아보는 환경이 일관되게, 지속해서, 예측한 것을 제공해주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믿음이 안정되게 구축됩니다.
거칠게 자기중심의 욕구를 들어내기만 한다면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변 다른 사람들을 위축하게 만듭니다. 위축되어 자기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자신감있어 보인다”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가 힘을 가지면 가정에서 사회에서 독재를 합니다. 우리는 첫해부터 오랫동안 환경과의 관계를 ‘맛보며’ ‘시험하며’ 익혀갑니다. “아! 이건 쓴 관계이구나!” 느끼면 “어떻게 나를 표현하고 조절할까?” 아니면 “어떻게 상대를 알아가고 접근할까?” 궁리합니다. 첫 해에 아기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익히고, 발견하고 또 저장합니다. 그후에 오랜 인생 역정에서 계속 써먹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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