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기’와 ‘스스로 익히기’ (I)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2강
프로젝트

노인이 되어 입맛을 잃은 우리 부부가 무얼 먹을까 끼니마다 고민(?) 합니다. 게다가 둘이 식성도 아주 다르기 때문에 같이 먹을 것을 택하기 어렵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나와 함께 사느라고 생선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웬간히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선택하라면 삼겹살이 더 좋다고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여러 가지를 각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곳 (food court)으로 갑니다. 며칠 전에 그 곳에서 나는 메밀 정식을 주문하고 남편은 보쌈 정식을 시켰습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며 그곳에 온 사람들을 둘러보게 됩니다. 우리 같은 노인도 간혹 있지만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남편은 늦게 들어오고 아이들과 저녁을 짓기보다 이것저것 손쉽게 각기 먹을 수 있으니 편리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 눈에 한 테이블이 눈에 걸렸습니다.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온 엄마였습니다. 먼저 나온 햄버거를 여자 아이가 혼자 곧잘 먹는 동안 엄마가 한식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세 명이 함께 얼굴은 보며 맛을 음미하며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엄마가 나이 차이 별로 없는 것 같은 (아마도 쌍둥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아이에게 번갈아 가며 음식을 떠먹여줍니다. 여자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입을 벌리고 잘 받아먹습니다. 혼자 먹던 햄버거도 이젠 엄마가 먹여주는 대로 먹습니다. 그런데 남자 아이는 스마트폰에 열중해있습니다. 아예 음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엄마가 자기 입에 가져다댄 숟가락에 얹혀있는 음식을 받아먹을 뿐입니다. 서로 대화라는 건 없습니다. 눈을 맞추지도 않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이제 학교에 갑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입맛도 모르고 눈도 맞추지 않고 배우기만 합니다. 학교에서 그 나이에 맞는 교과 과정이 있고 가르칠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이들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어른들이 만든 것이고,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합니다. 교육부가 있고 교육청이 있고 전문가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하는 욕구에는 전혀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채 일어나는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 자신의 느낌, 생각, 판단이 전혀 이런 학습과정에서는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선생이 질문을 만들고 대답도 주는 꼴이 됩니다. 아이는 허수아비입니까? 허수아비같이 엄마가 떠먹이는 음식을 아무 느낌, 생각 없이 받아먹기만 하던 아이들은 그런 방식밖에 모르니 이런 학교에서도 꾸역꾸역 주어진 것을 배워가겠지요. 성적이야 좋을 수 있겠지요.

이런 삶의 과정(교육)을 거치는 것은 놀이시기에 아이가 상상한 대로 자기가 어른이 되어 앞으로 살아갈 모습을 만들어가는 데 아이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 합니다. 그러다 보면 늘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르고 답이 주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됩니다. 아이를 길러도 기르는 법을 누군가에게 배워야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쳐주는 이가 없으면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실에 찾아온 많은 여성들이 “몰랐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많은 문제에 대한 답을 일일이 미리 얻을 수 없으니 당연합니다.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스스로 문제에 대면하고 해결하는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교육받지 못해서 입니다. 노인이 되어서 왜 이렇게 살았는지 자신이 바보인 것 같아 속상하고 되돌릴 길 없어 우울증에 빠집니다. 교육하는 어른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이들을 평생 허수아비로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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