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주신 대로 부모님 품에 안긴 첫해에 아기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고 또 부모의 존재를 받아들인 기초신뢰감을 키웠습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며 우리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맛을 본 때 쯤 (toddler) 우리는 스스로 의지를 품게 되는 독자성이 불타올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뿐 아니라 말로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워지며 상상하는 재미를 한껏 부풀리며 즐기고 부담없이 누리는 놀이시기에 우리는 못 할 것이 없는 슈퍼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어른만큼 몸이 자라지는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름의 포부를 품었습니다.
이제 네 번째 시기를 맞습니다. 누구고 한 번밖에 못 사는 삶을 자기만의 꿈을 펼치며 살려 하면 어른이 되기 전에 책임지고 어른으로 살 준비를 착실히 하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익혀야 할 기술을 익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데 필요한 사회성을 기르고, 사회 정치 문화 자연 환경 안에서 사는 이해심과 참을성도 길러야 합니다. 현대 산업사회가 되기 전에는 집에서 일을 배우고 도제관계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학교에 가서 배우는 길을 택합니다. 스스로 부지런히 애쓰며 배우려는 태도를 익히면 품어온 목적을 이루고 실현하며 살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게으르면 뒤처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심히 한다”는 태도가 이때 생겨나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고 이 덕목을 갖추지 못하면 뒤처지는 열등감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곡차곡 열심히 하지 않고 성적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습니다. 시험 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동무들 사이에서 “공부 하나도 못했다”는 엄살을 부립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고도 이 정도로 성적이 나온 것을 은근히 자랑하듯 합니다. 공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머리가 좋다는 것을 뽐내려 합니다. 어른들도 자기들 아이가 열심히 하지 않아 그렇지 머리는 좋은 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이 자기를 닮아 아이 머리가 좋은 것이라고 에둘러 자기 자랑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유난스레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천재라는 소수 아이들이 순조롭게 살 수 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아이들이 해야 하듯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르듯 차근차근 배우는 태도를 익히지 않고도 머리가 각별히 좋은 아이들은 쉽게 깨달아 알게 되기 때문에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어울려 사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섯 살에 미적분 문제를 풀 수 있었다 해도 동료 학생들과 나란히 교섭하며 공부하고 어울려 협력하며 살아야 하는 공동생활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부의 재능으로 아무리 악기를 잘 다룬다 해도 필요한 사회성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한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이 삶의 필요한 여러 측면을 다 “부지런히 열심히 애써서 해야 하는 노력”의 덕목을 참을성있게 갖추게 하는 태도를 오히려 방해합니다.
우리네 교육이 성적이라는 성취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탓에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봅니다. 그것도 영, 수, 과목같이 중요 과목에 특출하면 더 인정받기 쉽다고 여기는 상황이니 삶의 성실한 태도나 인성을 중시한다는 표어는 그냥 표어에 그치고 맙니다. 성적을 내기 위한 잔재주나 요령부리는 기술이 아니라, 참 깨달음과 이해를 위해 아낌없이 노력하는 성실한 자세를 학교교육이 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움을 추구하는 끈질긴 자세보다 쉽게 성적을 올릴 요령만을 부모나 학교가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삶을 누릴 것인가 놀이시기에 마음먹은 것의 정수를 누리려 하지 않고 쉽게 얻을 낚시 밥에 걸려들어 버둥대게 되기 십상입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삶의 동반자 되려 하지 않고 든든한 일자리에 눈길을 빼앗기고, 몇 캐럿 금강석으로 저울질하는 장님이 됩니다. 쉽게 잘 해내는 것보다 꾸준히 열심히 하는 자세를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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