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남녀가 아주 밀접하게 살아야 하는 결혼제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놀이시기 때 아이들은 부모와 결혼할 거라는 소망을 가지기도 합니다. 여자아이는 아빠와, 남자 아이는 엄마와 결혼할 거라고 믿습니다. 물론 아이에 따라 오빠와 결혼할 거라는 누이동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 살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 결혼할 거라는 환상을 가지면서도,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차츰 상상 속에서만 소망을 키우면서, 비밀 깊숙이 그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실천하기에는 어마어마한 일이라서 솔선의 다른 축인 죄의식과 불안(guilt & anxiety)이 생깁니다.
외동이가 아니면 맏이들은 이때 처음으로 동생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부모라는 막강한 경쟁의 대상이 벅차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이젠 동생이 끼어들어서 또 다른 경쟁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는 이미 움직임의 능력이 빠르고 커져서 어머니 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갖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겨 지내는 것에 당황합니다. “너도 아기 때는 이랬었다” 해도 딱히 마음 풀기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부모는 동생을 귀여워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부모와도 결혼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연적(rival)을 귀여워하라니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경쟁심과 질투를 느낍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쓰는 생존방침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고 사랑받기 위해 부모가 가지라 요구하는 마음을 품으려 시도합니다. 어른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키웠다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거죽으로 보이는 평화스런 모습과 달리 거인이나 맹수가 되는 환상에 젖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몸집으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공격할 수 없는 힘을 부모 모르게 상상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장난감으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아빠나 어린 동생을 해치는 상상을 몰래 하다가 다행히 들키지 않았어도 벌을 받을 거라는 공포와 죄책감을 남몰래 가지게 됩니다.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의 평화만이 아니라 아이들 속에는 공격과 파괴의 욕구가 잠재해있다는 것을 어른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썽부리지 않는 착한 아이라고 착하기만 하다고 여긴다면 아이들의 욕구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부모 말씀 잘 듣는 것이 아이들이 따르고 준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라고 여기므로 더욱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곤 합니다. 어른이 아이의 느낌과 생각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까맣게 모르고 어른의 요구에 따르기만 합니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간주하기 쉽습니다. 말썽부리지 않고, 하라는 공부 열심히 하면 어른들은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알아주지 않은 공격과 파괴의 욕구는 기회가 되어, 자극을 받으면, 크게 터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바쁘신 부모 대신 동생들을 보살핀 맏이는 마냥 착하기만 한 아이만 일 수 없습니다. 자기도 자기욕구를 충족시킬 기회를 가졌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도 허용할 수 없었고, 어른들도 “착한 맏이”라고 대우해주고, “아무개 집 맏이 봐라” 착하다 소문나고,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칭찬을 듣고, 또 듣고 싶어 했습니다. 맏이가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태어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둘째가 그 압력을 다 뒤집어씁니다. 언니같이 하지 말고 엄마 마음에 들게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되고, 자기도 엄마가 되고 보니, 이제 너무나 억울해집니다. 엄마가 천방지축이라고 해서 자기도 그렇게 치부했던 언니나 동생이 오히려 자기답게 살아온 것이고, 자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젠 엄마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공격과 파괴의 마음이 도저히 눌려지지 않고 올라옵니다. 자신을 향해 공격하고 파괴하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