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겉으로 슬쩍 보고, 상냥하게 말 걸고, 행동하는 것으로는 모두 멀쩡한 듯합니다. 자기만 느끼고 있는 걱정, 불안, 두려움을 이야기하기 전까지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보면 정말 괜찮은 것인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전혀 안 보이고 자기의 힘든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부처님 같이 움직이지 않고 무표정인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들으면서 맞장구를 잘 치는 사람도 있고, 누가 있거나 상관없이 손 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기초신뢰감이 있으면 다음에 오는 시기마다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맞아 움츠러들어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자신과 환경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두려움이 앞서고, 뒤로 물러서려 하니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뭐든 제대로 보려고도 않고, 들으려고도 않아 문제 정수조차 모르고, 해보려 하지 않고, 못 할 것이라고 여기고, 주저앉으려고만 합니다.
우리 모람들도 “다 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믿지 못할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자신을 고치고 자라야 한다는 명제가 부담스럽게 됩니다. “내가 잘 못했다는 말인가?”에 이르면 억울하고 고집부리는 상태로 몰입합니다. 아니면 “아무리 당신들이 그래도 나는 아니야!”하는 뻣대는 마음도 품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른의 보살핌을 고맙게 받으며 고맙게 느끼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엄마의 사랑의 보살핌을 당연하다는 듯 고마움도 없이 자기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 사랑의 마음을 고마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존재가 소중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도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모르고) 자기만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세월호와 관련된 수많은 어른들의 부끄러운 짓이 그런 사람 때문에 생긴 겁니다. 어디 선장뿐이겠습니까?
전통의 교육이 지나치게 어른 중심이었기 때문에 문제였다고 여겨서 새 교육은 아이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중심이 아이 멋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육(환경)이 아이와 협력하는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신뢰와 바깥 (어른, 교육)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 자신이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정당하다고 믿어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적극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의 표현을 알아보는 환경이 일관되게, 지속해서, 예측한 것을 제공해주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믿음이 안정되게 구축됩니다.
자기의 아픔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원수의 마음까지도) 같이 생각할 수 있다면 원수를 저주할 마음이 생길까요? 놀라운 것은 이런 마음이 어린 시절에 아이와 양육자 (엄마 역할 하는 사람) 사이의 안정된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기농으로만 잘 먹이고, 아토피가 생기지 않을 옷만 입히고, 공해가 없는 곳에서 기른다 해서 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괜찮아!”하는 마음,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어도 “자기답다”는 것에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아이-엄마’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신뢰감(trust)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자기 잘난 자신감(confidence)이 아닙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서 서로가 가지는 긍정의 신뢰관계를 말합니다. 부모가 일방으로 제공해주고, 지시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아이의 필요를 일방으로 충족시켜주고, 아이는 아무런 욕구의 표현이 없어도, 아니면 최소한의 표현에 한 치도 놓치지 않고 즉시 주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참기도 하지만, 서로 적절하게 알아주고, 협조하여, 서로 적절하게 만족스러운 관계를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서로 적극이 되고, 서로를 감사하는 관계를 가집니다.
오지랖 넓은 것을 흉으로 여기고 똑똑하게 자기 앞가림만 잘 하라고 하는 것은 결코 똑똑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경우가 없을 허사입니다. 뿔뿔이 똑똑하다는 아이를 길러내서, 이제, 여기, 우리는 제자의 논문을 훔칠 뿐 아니라 연구비도 빼먹는 사람을 교육 수장으로 지명하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내가 만난 한 여성이 오히려 책임있고, 존경받을 교육수장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아이와 어른의 관계가 일방통행이 아니면, 협박과 강제가 아니라 서로 듣고 표현하는, 서로 주고받는 ‘상호관계’가 싹트는 겁니다. 아이는 활발하게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면서 자라고 엄마와의 관계뿐 아니라 동무들과 이웃들과 합의하고 타협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익히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맞는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처리해낼지를 익혀갑니다. 아이의 표현을 제대로 보고 들어 아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면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며 문제를 풀어갈 수 있게 됩니다. 아이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자란 사람은 제대로 마음을 전달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하고 무기력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