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에 짜인 놀이로 어른들이 아이들의 솔선을 방해하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이끌며 놀 수 있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이고 그 아이의 평생을 튼튼하게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솔선의 감을 만족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맞장구를 적절하게 잘 쳐주는 감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몸과 마음을 안정되게 움직이고 멈출 수 있으며 미세한 활동을 구분하고 스스로 혼자 하는 기회를 아이들이 가져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높은 걸상에 앉아서 밥 먹으며 수저와 그릇을 떨어뜨리고 던져보는 시기를 거치는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겁니다. 국수 가락과 콩나물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던 혁빈, 동화, 은유의 옛날(?)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계단을 오르며 높이를 조절하던 그 아이들을 기억합니다. 섬세하게 구분하고 놀기 (살기) 위한 아이들의 준비단계 훈련이었음을 압니다. 아이들을 묶어두고, 엄마가 떠먹이기만 하는 것이 밥상과 마루를 어지르지 않고, 아이 얼굴과 옷을 엉망으로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짧은 안목인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아이라면 이미 독자성을 가질 것을 전제로 하고 가족 바깥의 다른 사람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재미있게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요인이고 이를 실전에서 겪어보는 때가 바로 이시기입니다. 시행착오를 한다 해도 큰 낭패를 보지 않고 놀 수 있는 때라 현실에서 안전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양한 관계에서 놀아보는 것이 자신의 영향력(정치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놀이시기는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지 “그런 사람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과정”을 밟아가는 때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다음에 올 중요한 학령기에 앞에 놓인 헐값의 시기로 묻어버릴 수 있는 때가 결코 아닙니다. 아이들은 경험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 가치를 흡수하고, 머리 속에서 정리하고, 분류하여 고르고, 선택하면서 자신이 행동할 것을 만들어갑니다. 자신을 나름 매력적으로 만들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 영향력을 가지려 애쓰기도 합니다. 자기만의 매력이 솔선 (initiative)을 효과있게 할 것임을 알게 됩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바른생활 시간에 가장(家長)에 대해 배우고 시험을 봤습니다. 첫 문제에 걸려 시험을 엉망으로 본 겁니다. “우리 집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의 답은 ‘아버지’여야 한다는 것을 그 아이가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아빠, 엄마, 동생이 다 자기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고민에 빠져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우리 가정에서 어른과 아이가 완전히 평등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아이들과 어른의 위치를 우리가 얼마나 의심없이 차등을 두고 가르치고 배워왔는가를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어머니 품에 처음 안기는 순간부터 푸근한 기초신뢰감과 든든한 독자성이 건강하게 자라나서 거침없는 놀이시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것이 어른이 되어 사는 틀과 모양새 그리고 품을 이미 만든 겁니다. 어른이 되어 어찌 사는가 하는 것은 놀이시기에 얼마나 건강하게 잘 놀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아이의 느낌과 상상의 힘과 품이 거침없이 살아 확장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있었기 때문에 삶의 과정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고, 늘 결과를 걱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 다니게 되면서 동무들의 요구에 대해 어디까지 들어주고, 어디부터 거절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엄마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알려줄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알아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자연스레 되어야 합니다. 동무에게 “No!” 했다고 해서 그 동무가 자기를 싫어하고 같이 놀지 않게 될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동무도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 것을 전제로 하는 우정이 생기고 자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동무의 마음을 알고 그 표현을 알고 존중하는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때 여러 가지 놀이 감(장난감) 잘 쓰는 것에 열심입니다. 이미 되어있는 것도 자신에 맞게 변형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을 고안해 냅니다. 한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순식간에 여러 가지로 용도로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이 노는 아이들과도 합의를 볼 줄 알게 됩니다. 자기 구미에 딱 맞는 아이들 하고만 노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놀고 싶은 놀잇이감을 자기 식으로만 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절충하고 합의를 하면서 노는 것을 즐깁니다. 공평하게 놀 줄 아는 아이가 자라서도 공평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열심히 한다”는 태도가 이때 생겨나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고 이 덕목을 갖추지 못하면 뒤처지는 열등감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곡차곡 열심히 하지 않고 성적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습니다. 시험 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동무들 사이에서 “공부 하나도 못했다”는 엄살을 부립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고도 이 정도로 성적이 나온 것을 은근히 자랑하듯 합니다. 공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머리가 좋다는 것을 뽐내려 합니다. 어른들도 자기들 아이가 열심히 하지 않아 그렇지 머리는 좋은 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과 어른을 신뢰하고, 스스로 할 독자성을 갖춘 아이들, 그리고 놀이시기에 몸과 마음을 활발하게 발달시켜온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 학교는 이런 아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은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운동장 수업이라면서, 아이들을 똑바로 줄 서있으라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무리입니다. 게다가 마이크에 대고 “앉아!” “서!” 소리 지를 때마다 아이들이 앉고, 서는 것의 의미를 아이는 알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학교에 다녀야 하나?” 깊이 의문하게 되고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