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역에서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 배우며 사는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든가 사회복지사가 되어야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즐기고, 잘 할 수 있는 영역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즐기며 할 수 있는 것은 싫증나지 않고, 힘들다 하지 않고 할 수 있어 열심히 훈련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 연습하는 ‘하논’도 재미있다던 내 아들 어린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립니다. 역사책을 즐기는 아이는 방구석에서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읽습니다.
아이들이 이제 학교에 갑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입맛도 모르고 눈도 맞추지 않고 배우기만 합니다. 학교에서 그 나이에 맞는 교과 과정이 있고 가르칠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이들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어른들이 만든 것이고,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합니다. 교육부가 있고 교육청이 있고 전문가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하는 욕구에는 전혀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채 일어나는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놀이시기에는 상상의 세계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현실과 논리의 세계에서 자라고 어른 되기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또 우리 사회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구나 다 처음 학교 갈 때 부모님이 당부하셨던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똑 같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네 말을 잘 하고, 친구들과 갈등을 잘 해내며 지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각기 다른 우리네 아이들이 자기만의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표현을 하는 기회를 잃게 합니다. 남다른 생각과 표현이 허용되지 않으면, 자신을 표현하는 아이를 문제아 취급을 하게 됩니다.
자기마음대로 놀던 때를 지나 이제 현실을 보게 되는 시작을 아이와 함께 엄마도 하게 됩니다. 아이들도 지켜야 할 규칙과 질서를 익혀가지만 엄마들도 자기 아이만 보는 데서 다른 아이들 틈에 있는 자기 아이를 봅니다. 내 아이가 공주도 왕자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기 아이를 봅니다. 놀이 시기에 아이에게 환상이 용납되었다면 이제는 현실을 보는 때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마냥 놀 수는 없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놀이를 피하듯이, 공부를 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놀이시기에 장난감의 기능을 터득하고 재미있게 놀았듯이 공부해야 할 과제를 터득하는 재미를 아이들이 느끼게 도입하고 그런 경험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공부의 맛이 지겨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레고나 퍼즐을 낑낑 대면서도 맞추고 재미를 느끼듯이 어려운 과제도 낑낑대며 푸는 것을 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통이 심해도 아이를 낳는 걸 피하지 않듯이 쉬운 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놀이시기에 장난감의 도구기능을 완숙하게 익히며 노는 것뿐 아니라 생각하고, 실험하고, 기획하며, 공유하는 내면의 보이지 않는 능력도 영글게 되어야 합니다. 학교교육을 받는 때에도 장난감대신 교육 내용을 될수록 완벽하게 학습 (master) 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두고 자기답게 깊이 생각할 수 있고, 새롭게 실험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새날을 향해 계획하고, 친구들이나 가족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능력으로 완성되는 종류의 학습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잘 하려 하는 심성을 알아주는 선생과 부모가 아이들을 격려하면 아이들은 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른으로 사는 데 필요한 모든 면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공부만 잘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운동만 잘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시민, 건강한 사람으로 크도록 학령기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