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늙은이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3강
프로젝트

오랜만에 예일이 세 살짜리 딸 봄이를 안고 나타났습니다. 동화, 동연, 예지, 동주랑 어울려 예배보고, 어른들 대화를 참아내고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호기심 가득한 맑고 큰 눈의 봄이와 마주하고 저녁을 먹으며 그 아이의 웃음을 즐겼습니다. 얼굴 전체로 웃을 때는 호기심의 긴장이 사라지고 마음 놓고 ‘장난꾸러기’가 됩니다. 샐러드에 있는 토마토 씨를 수집하는데 이모들과 할머니가 제공자가 되기도 합니다. 씨를 먹어 뱃속에서 토마토를 키우자는 항심 이모 말에는 설득되어 고민할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제일 장난꾸러기인가?” 제 엄마에게 묻습니다. 이 얼굴 저 얼굴 두루 살피며 망설이던 봄이의 결정이 났습니다. 영광스럽게도 할머니 제가 낙점되었습니다. “여든 해를 장난꾸러기로 살았으니” 인정하고 <장난꾸러기 할머니> 상(?)을 수락했습니다.

 

삶의 모든 요인들로 저만의 여든 해를 쌓아왔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노인들이 다 차곡차곡 제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느 누가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도 하고 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도 자신의 삶의 터에서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 마지막을 맞은 것이 아니고 이제도 여기에서 늙은이로 살고 있습니다. 어떤 늙은이인가는 모두 각기 다릅니다. 다른 늙은이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과 같은 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다른 몸으로 달리 숨쉬고 달리 움직이며 살아 이제의 자기가 되도록 살았기에, 각기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대체해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 비교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러워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웃 늙은이의 한탄을 가끔 듣습니다. 젊은이들이 늙은 부모님들의 형편을 이야기합니다. 그나마 관심있는 젊은이라 부모님 삶의 상태에 마음 쓰지, 자녀들 대부분은 눈여겨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노인의 날’이라고 ‘어린이 날’에 견주어 만들어냅니다. 어린이는 새싹이라며 희망에 부풀어 축제의 날로 삼습니다. 공휴일이 되어 어느 날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날은 대부분 모르고 지나칩니다. 혹 저녁 뉴스에 학대받는 노인들의 문제를 다루는 보도를 보고 들으면서 그날이 바로 노인의 날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는 정도입니다.

 

이제 늙은이가 된 세대는 “자녀들을 위해 애쓰고 살았더니 이제 와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이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들의 의식주를 위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일’하는 것에 집중해서 살았다는 말을 합니다. “먹고살기 바빠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만 하고 있으면 마음이 담긴 ‘관계’는 거저 따라오는 것인 줄 알았던 겁니다. 배불리 먹는 것만큼, 아니 서로 알아주는 마음, 성의있는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나 삶의 첫 단계에서부터 믿을 만한 양육자와의 안정된 관계를 가졌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살림을 잘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용납받으며 안심하고 자라지 못하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편하게 살게 됩니다.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사랑해주는 남편과도 경쟁하고, 자녀들에게도 요구가 많아집니다. “내 친구 딸은 엄마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했다는데…,” “여행 보내줬다는데…” 연신 자녀들에게 압력을 줍니다. 물론 그 전에는 옆집 아이 성적표와 자기 아이 성적을 비교했을 터이지요. 늙으니 몸도 불편해집니다. 스스로 좋아지려고 노력하기보다 ‘아프다는 것’을 내세워 가족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환자라고 존재감을 부풀리기도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받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과 마음을 공유하는 관계가 있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 마음을 아는 사람이어야 했고, 또 이전에 고마운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이 든든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있게 살아왔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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