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길을 늘 같이

에릭슨 발달단계

에릭슨 발달단계
5강

내가 읽는 신문에 ‘이진숙의 휴먼 갤러리’라는 글이 때를 맞추어 실립니다. 신문 한 면을 차지하는 글로 유명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흥미롭게 읽곤 합니다. 이번 주에는 ‘티치아노의 이중 잣대’라는 제목으로 남녀차별하는 그때의 생각을 그림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아직까지도 남녀를 구분할 뿐 아니라 차별하는 현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판이니 15, 16세기에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런데 늘 글 끝에는 소개된 그림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이번에는 <베를린 국립 회화관>에 가면 그 그림 이외에도 13-18세기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미술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라면 언젠가 가볼 생각을 하거나 실제로 갈 계획을 하겠지요. 그런데 늙은이가 된 나는 신문에서 읽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합니다. 한국방송대상을 받았다는 KBS <순례>라는 작품가운데 하나로 ‘한 걸음 나에게로’라는 프로를 어제 밤늦게 보았습니다. 멕시코에서 미국을 거쳐 카나다에 이르는 <태평양 산기슭 트랙 (PCT)> 4,300Km를 걷는 이의 기록을 봅니다. 신발창을 구멍내면서, 목마름과 허기를 참으면서, 쨍쨍한 햇볕에서 부터 쏟아지는 눈발까지 맞으며 혼자 걷는 힘든 길을 참아내며 걷고 나서는 “즐겼다”는 이들을 TV로 봅니다. 나는 정작 그 길을 나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름 바캉스도 이미 내게는 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180일을 걷고도 중간에 멈춘 70세 노인도 있었지만 그 노인은 보통이 아닌 것이지요.

 

어제보다 오늘 내 걸음이 늦어집니다. 하려던 말이 뭐였나 말하다가 잊기도 합니다. 잘 알던 사람의 얼굴은 기억해도 이름은 가물가물 멀어집니다. 보톡스로 주름을 펴고 비싼 화장품으로 기미를 가릴 수는 있어도 늙은이 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박진선 아기가 백날 지나면서 뒤집고, 엎드려 상반신을 꼿꼿이 세워 고개를 돌리며 세상을 훑어보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은유와 나눈 대화를 윤재오님이 읽는데 곁에서 동화가 “나하고 똑같애”하는 관찰한 경험의 판단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연애할 때를 거치고, 결혼하고 부모가 되는 삶의 주기를 자연스레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로 사는 것은 많이들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늙어진 속도를 퇴화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뭐든 “잘 하고, 빨리 하는 것”을 우리는 늘 채근받아 왔습니다. 요즘 아서 프랭크가 쓴 <아픈 몸을 살다>를 읽었습니다. 늙기를 거부하듯이 우리는 아프기를 거부합니다. 아픈 것도 삶의 일부로 용납하기 어려워합니다. 늙은이의 삶의 때도 삶의 일부임을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혼자 살 수 없어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듯이 늙은이와 함께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독거노인’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아픈 사람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듯이 늙은이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은퇴준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돈으로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경제기획도 필요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일방통행이어서는 안 됩니다. 늙은이의 권리와 동시에 늙은이의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돌보는 사람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려면 돌보는 사람에게 아픔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해야 할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서로 책임지고 서로 권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늙은이가 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늙은이의 경험을 알릴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에릭슨의 심리학이 윤리의 심리학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 발달단계를 건강하고 순조롭게 다 거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함께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성취해내는 것을 강조하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협력할 수밖에 살 길이 없다는 것을 곧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손해라고 계산하는 못된 버릇이 생겼습니다.

 

모두 자폐증을 앓는 늙은이가 되도록 긴 세월을 혼자를 되뇌며 지나가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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