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보여줄 수 없다면...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7강
프로젝트

광화문에 주말마다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4.19 때 의학 본과 1학년이어서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 때는 대학생 중심의 움직임이었다면 이번엔 온 나이층이 다 나선 듯이 보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의 또렷한 발언에 모두 기특해하고, 귀여운 초등생의 글 읽기는 어른 흉내 같아 귀엽습니다. 주최 측 수 헤아리기와 보호와 방어한다는 경찰의 숫자는 어림없이 차이가 나지만,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평소에 자동차 다니라고 넓혀놓은 거리를 사람들이 자동차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다닐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사람이 많아 길을 건너기란 거센 파도를 거슬려 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많은 것에 짜증나기보다 보기 좋다는 마음에 뿌듯했습니다. 촛불을 들고 파도타기하는 빛의 물결이 아름답습니다. 사회자의 구호에 따라 외치는 소리는 가슴을 뭉클 울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 많은 이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감격스럽습니다. “나 혼자라는” 외로운 생각을 넘어 “같은 마음이라는” 연결을 느낍니다. 자기만 알고 사는 젊은이 같아 보이는데 한껏 소리 질러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달리 보입니다. 늙은이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띕니다. 모모 어버이나 모모 어머니회에만 노인들이 다 몰려가지 않는 다는 걸 보여줍니다. tv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현장의 느낌이 확실히 다릅니다.

 

이 사태가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매일 아침이면 “세상이 어찌되었나?” 신문을 펴고 tv 뉴스 채널을 켭니다. 머리를 굴리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자기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할지 모릅니다. 촛불의 숫자가 무시할 수 없다 여기니 눈치 보아 촛불 든 자기 사진을 자기 페이스북에 올리는 속셈을 빤히 보여줍니다. 저마다 자라온 배경이 다르듯 다른 심성으로 다른 욕심으로 판단할 겁니다. 전문 정치인들 뿐 아니라 촛불 든 시민들이나 tv화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두 다른 심성으로 역사가 어찌 진전될지를 기다립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녀 소년들에게 우리어른들이 어떻게 진전시켜나가는지 보여줄 것이 제일 마음 쓰입니다. “아, 그래도 어른들이 잘 해내는구나” 믿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처리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이 고쳐지고, 착하고 착실하게 책임을 다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기회인데 그걸 해내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회문화가 믿을 만해서, 예측가능하여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 사춘기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도 어른이 되어서 책임을 다 하며 살만 하다는 자기정체감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자기와해 (identity diffusion)를 경험합니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굴러가는 세상의 수레에 자기를 내맡기는 수동의 자세, 남이 하는 것 보며 따라하는 자기 주체를 잃은 삶을 살게 합니다. 제대로 움직이는 민주 사회가 우리 개인 각각의 삶과 이렇게 연결되어있습니다. 부패한 독재자라도 먹고 살게 해주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건강하고 활발한 ‘진짜’ 자기자신으로 살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르게 굴러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변에 희망 없이 버려진 이른바 ‘문제아’들은 가까운 어른들과 넓은 사회가 몰아간 결과일 뿐입니다. 희망을 보여줄 바르고 믿을 수 있는 건강한 어른의 사랑이 있어, 자라나는 아이들이 희망을 품고 튼튼하게 자라게 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어 희망이 있고, 또 다시 희망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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