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훈련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3강
프로젝트

영우가 학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같은 얼굴이 마냥 심각해진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집니다. 자기 어깨보다 넓은 책가방을 지고 가는 뒷모습이 눈에 선히 그려집니다. 마냥 놀기만 했던 때에서 이젠 규칙을 지켜야 하는 엄격함에 성실하게 맞추어 갑니다. 영우는 누나나 형보다 더 빨리 학교로 나선답니다. 독자성을 가지고 스스로 하려는 마음과, 바깥 학교제도에서 정해진 것을 해낼 노력을 요구받는, 두 반대되는 방향의 힘의 가운데 선 입장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바깥에서 하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고리타분한 전통 교육방식은 주어진 것을 일방으로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보교육은 ‘아이 중심의 교육’이라고 합니다. 썸머힐 학교는 대표로 후자에 속한 것이지만 대부분 우리네 학교는 전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우리네 아이들은 배우는 것에 참 맛을 맛보기 어렵게 됩니다. 자신의 내면의 참 동기에서 괴리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명하고 좋은 교사는 ‘지금’ 아이가 가진 ‘관심과 능력의 상태’를 알고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을 그 아이의 상태에 맞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무리되지 않게 안내합니다. “네 멋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느슨한 태도가 아니라, “그냥 넘길 수 없다”는 확실한 자세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놀이시기에는 상상의 세계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현실과 논리의 세계에서 자라고 어른 되기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또 우리 사회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은 전부터 말로만 되뇌어온 것이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교육 때문에 아직도 악순환의 고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삶으로 체험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교육의 주체인 아이를 무시하는 어른들이 마음대로 교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느끼고, 생각하며, 배우고, 바뀌고, 자라서, 성숙한 존재가 되어야만 교육의 효과를 보는 것인데, 전혀 동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는 한 보기가 우리의 심리학 교실입니다. 이미 있는 심리학이론을 소개하고 기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갑니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다른 것도 배워갑니다. 서로 거울이 됩니다. 서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을 익힙니다. 교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모두 진정한 교재입니다. ‘마음’이라는 말, ‘느낌’이라는 말을 이미 사전풀이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삶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서로 보살피며 살자”는 말이 어떤 뜻인지 교재로만 배울 수 있을까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교훈 같은 당부는 말로 익히고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같이 느끼는 (공감하는) 바탕이 우리에게 이미 있었는데, 교육이 이를 앗아가고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성취만을 바라고 추구하게 만드는 교육의 문제가 주범입니다. 그러니 돈과 권력이 우선되는 척도가 됩니다. 보수 진보 가림없이 정당들도 모두 똑같이 ‘경제 살리기’를 내세웁니다. 국민들이 모두 이를 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모두 경제와 그 힘을 지상으로 삼는 교육정책의 산물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입니다.

경제논리가 아닌 사람다움의 소중함을 내동댕이친 겁니다. 학교에만 아이를 맡길 수 없는 이유이고, 학교를 바로 세우는 시민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그런 자리에 내칠 수 없으니까요. 영우와 세훈이 얼굴을 떠 올립니다. 그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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