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일’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다?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5강
프로젝트

아주 어린 시절에는 아이가 노는 것이 아이의 온 삶이자 일이었습니다. 몸의 발달이나 마음의 발달이라는 엄연한 현실의  온전한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온전한 놀이였습니다. 환하게 웃어도, 배고프고 졸리다 울어도, 손가락을 빨아도, 옹알이를 해도, 뒤집어도, 기어도, 모두가 아이에게는 의미심장한 놀이이자 일이었습니다. 그걸 알아주는 어른들이 아이의 진전에 기뻐하고 손뼉쳐주면 아이는 신나서 자기가 해낸 것을 인식하며 더 활발해집니다. 그러다가 놀이시기에 이르러 아이는 환경에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동무들과 같이 노는 것으로 진전합니다. 

 

 

놀이가 언제나 순조롭기만 하지 않습니다. 지나쳐서 위험하게 될 수 있고,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놀면서 위험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멈춰야 하는 불안을 겪기도 합니다. 악몸이 무서워 잠자기를 무서워하듯이 노는 것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 심해지고 놀이에서 실망하면 아이는 놀이 장면에서 퇴각해서 혼자 백일몽에 빠지거나, 손가락 빨고, 앉았거나, 자기 몸만을 즐기게 됩니다. 놀이가 만족스러웠다면 아이는갈등과 문제를 푸는 데 ‘명인’이 됩니다. 잘 노는 것이 그 이후의 삶에도 명인이 되게 합니다. 

 

 

얼마 전에 상담실에서 만난 젊은이가 떠오릅니다. 언니는 뭐든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호감을 주며 잘 지내는데 자기는 아니랍니다. 자기와 달리 언니가 인상이 좋다는데 그 젊은이도 인상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단지 표정이 문제였습니다. 표정이란 마음의 표현이니 마음이 편치 않다는 차이일 뿐입니다. 문제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언니와 비슷한 성향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언니에게 손쉽게 반응하여 두 사람은 잘 지낸 겁니다. 언니와 다른 성향의 아우를 그 어머니가 알아주질 않은 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둘째에게는 만족스러울 수 없는 삼각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른의 놀이 개념은 일하고 나머지 시간, 일하는 사이사이, 짜투리 시간에 노는 것을 말합니다. 학교는 이렇게 “일하고 노는 삶의 균형”을 준비시킵니다. 다시 일을 잘 할 수 있게 (create) 회복하는(recreate) 목적으로 쉬고 논다고 생각합니다. 일과 놀이의 균형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만나게 됩니다. 일을 (학생에게는 공부가 되겠지요) 열심히 하는 것을 칭송하기는 쉽습니다. 휴가 없이 평생을 일했다는 사람을 위인(?) 취급하기도 합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이솝이 우리에게 잘 전해주었습니다. 아이가 잠 안 자고 공부하는 것을 엄마가 뿌듯해합니다.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놀지 않고 공부하는 것을 엄마는 아이에게 계속 요구해도 되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일하는 기계로 기능하며 사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서 아무런 욕구 없이 일만 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으면서 일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사랑을 주고받지 못한 사람은 무엇엔가 애착을 느껴야 합니다. 게임에 중독되고, 술과 노름에 빠지는 것에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앞에 말한 젊은이의 언니는 명품을 탐내지 않는데 자기는 명품에 대한 욕심이 있어 어머니에게 야단맞으면서도 최소한 한 해 두 번은 사서 가져야 한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마냥 놀 수는 없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놀이를 피하듯이, 공부를 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놀이시기에 장난감의 기능을 터득하고 재미있게 놀았듯이 공부해야 할 과제를 터득하는 재미를 아이들이 느끼게 도입하고 그런 경험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공부의 맛이 지겨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레고나 퍼즐을 낑낑 대면서도 맞추고 재미를 느끼듯이 어려운 과제도 낑낑대며 푸는 것을 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통이 심해도 아이를 낳는 걸 피하지 않듯이 쉬운 일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누가 사는 것이 쉽다고 했는가?”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재미있게 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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