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아이로 자라다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3강
프로젝트

아직 혼자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동연이가 언니 동화와 은유를 보는 눈길은 신기와 부러움 섞인 선망입니다.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니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동화와 은유는 자기들에 얼마 되지 않은 예전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자라고 바뀌었는지 채 알지 못하겠지요. 원하는 것이 있어도 말로 표현 못해 큰 소리로 울었었는데 그때 엄마는 창피하다고만 생각하고 부랴부랴 그 자리를 모면하려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기에 바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아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풀리지 않아 얼마나 답답했던지 기억이나 할까요? 그러나 움직임과 말이 능해지니 이제는 그런 문제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놀이시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나름의 위기감, 두려움, 불안, 긴장감들을 이제 혼자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우는 도리밖에 없었다면 이제 빤히 쳐다보며 머리를 굴려 혼자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창립기념 행사장에서 덩치가 큰 내 둘째아들과 은유를 만나 소개했습니다. “문 할머니 아기야” 소개했더니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 쳐다보더니,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될, 두려워할 존재는 아니라는 듯 지나칩니다. 익숙한 문 할머니와 동행했으니 안심했겠지요. 알트루사 이모들도 많이 있으니 무서운 사람이라면 이모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해도 되니까요.

 

그래서 놀이시기 아이들은 훨씬 안정감있게 편하고 명랑합니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아이는 솔선해서 자기 몸과 마음으로 잘 자랍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방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항심님이 카페에 올린 최근 글이 솔선을 방해한 어른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아이가 누구와 어떻게 노는가를 보고 어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인 경우에 어른이 딴지를 걸면 아이의 ‘솔선감’은 훼방 받게 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속담을 철저히 믿고 나중에라도 아무나 (어머니가 마뜩찮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 저렇게 무턱대고 좋아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하는 거지요. 좋은 사람을 마냥 좋아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 어머니의 기준으로 곧바로 검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연속 방속극에 자주 등장하는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여자의 연애를 방해하는 부모들 이야기는 사실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너덧 살부터 이미 짜놓은 판에서 놀았던 부잣집 아이가 청년이 되었다고 해서 틀 바깥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드라마이고 픽션일 뿐입니다. 재벌가에 시집간 연예인들이 왜 이혼하게 되는지 설명이 되는 겁니다.

 

놀이시기에는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또 자신이 에너지를 생산해내면서 놀게 됩니다. 동화가 미끄럼틀을 몇 번 타면 그만둘 것이라고 동화엄마가 생각했답니다. 최대한 열 번쯤 탈거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자그마만치 쉰 번을 타고 또 타더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지치지도 않고 말입니다. 물론 동연이가 흥미를 잃지 않고 경이롭게 쳐다봄으로 둘이 같이 협력놀이를 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이들이 놀아서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 아니고, 놀면서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겁니다. 물론 그 끝에는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잠도 에너지를 만드는 거니까 모두 놀이시기의 한 부분입니다. 요즘 동화에게는 예배시간이 잠자는 시간입니다. 어른들이 조용히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고는, 대화시간에 기분좋게 깨어나서 발그레한 얼굴로 어른들을 반갑게 대하고,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겁니다. 규격에 짜인 놀이로 어른들이 아이들의 솔선을 방해하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이끌며 놀 수 있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이고 그 아이의 평생을 튼튼하게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솔선의 감을 만족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맞장구를 적절하게 잘 쳐주는 감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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