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6강
프로젝트

스카이프 할 때 몇 달 전에는 누르면 음악이 나오는 장난감 음악에 따라 멀리 사는 나의 손녀 아샤가 아이랜드 레인댄스 같은 춤을 열심히 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한 시간 내내 신나게 춤만 추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춤을 추려 하지 않고 다른 활동으로 넘어갔습니다. 옷을 벗고 기저귀만 차고 붓과 물감으로 자기 몸에 그림그리기 하는 것도 한 가지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손과 발, 그리고 배에 그리던 것을 옷을 벗지 않고도 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허긴 날씨가 추워졌지요.) 코에 그립니다. 자기 코에도 그리고 자기 엄마 코에도 그리고는 서로 코와 코를 맞대고 좋아합니다.

지난 주에는 바다 이편에 있는 할아버지가 설득해서 다시 음악을 틀고 춤을 잠깐 추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잠깐 추고는 책상 밑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부끄러우냐고 제 엄마가 묻습니다. 빼꼼히 내민 얼굴에서 볼 수 있는 표정은 자기를 보고있는 우리의 표정을 살피는 듯한, 그러면서도 우리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확인하는 듯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던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생기는 정서반응입니다.

어제 동연이가 문순 이모 무릎에 앉아 자기가 좋아하는 국수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샤보다 한 살 가까이 어린 동연이는 건너편에 앉아 자기가 먹는 모양을 보고 있는 인영 이모의 묘한 표정의 의미를 아직 잘 모릅니다. 국수가 입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동연이만큼 즐겁게 천진난만하게 보아줄 수 없는 ‘깔끔이’ 이모라는 걸 모릅니다. 웃는 모습이 그냥 보통 때 기쁜 마음으로 동연이를 봐주던 열린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고 서로 벌쭉이 웃기를 잘 합니다. 아샤도 그 나이에는 늘 웃었습니다.

그러나 독자성이 생기면 자기가 웃을 만할 때 웃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자기를 보고 웃을 만한 일인지 점검을 합니다. 눈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은 필요한 정서이고 훈육할 때도 적합하게 쓸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흔히 ‘주책’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동연이 보고 주책이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아기같이 행동하고 “솔직하다거나 순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 문화마다 정해진 것이 있고 이를 자연스럽게 교육받게 되는 겁니다. 잠옷을 입고 바깥을 활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대학 캠퍼스에 환자복만 입은 채 산책나옵니다. 식탁 앞에 앉아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시장 맛보기하는 데서 먹어보라 합니다. 다른 사람들 다 있는 데에서 다 들릴 만한 큰 소리로 아이나 남편을 야단칩니다.

그러나 독자성 발달에 지장을 줄만큼 강하게 부끄럽게 만들어 아예 창피함을 강화한다면 아예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아이가 얼굴을 가리고 엄마 뒤로 숨는 정도가 아니라 ‘적절함’의 감각을 놓치고, 아예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당신 앞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 집니다”는 말은 노래 가락으로는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삶을 아주 위축시킵니다. 지나치다는 것은 언제나 문제를 부릅니다. 아이가 더럽다든지 나쁘다는 기준이 지나쳤을 때 아이는 아예 관심에서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깨끗이 먹는 것도 좋지만 아이가 견딜만한 정도를 넘어서면 아이는 입맛을 잃습니다.

인생살이에 먹고 사는 것을 위한 밥벌이(성취)도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맛을 잃는다면, 왜 사는가를 묻게 됩니다. 동연이 같이 우리에게 공평하게 늘 웃어주는 때도 사랑스럽지만, 아샤같이 웃을 일인가를 스스로 생각하는 심각한 때도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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