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 서로 눈치 잘 보기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4강
프로젝트

동화가 엄마에게 폭탄선언을 했답니다. “그러면 나 집을 나갈 거야”라고 말입니다. “쪼꼬만 한 게 제가 나가면 어딜 나갈 거야” 엄마는 우습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나가겠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랬을 때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자기가가 지금 하던 걸 마치면 엄마가 하라는 걸 한다고 말했는데, 엄마가 듣지도 않고 또 똑같은 말을 하니까 그랬다고 했답니다. 어디 동화 엄마만입니까? 우리 어른들이 얼마나 아이가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어른이 꺾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서로 마음을 알아주고 서로 도움이 되려 협력하는 묘미를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변 가리기 훈련은 한 보기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 조절의 묘를 살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스스로 조절하는 기능의 발달을 어른이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어른들이 강제로 하게 하거나 너무 일찍 조절할 것을 기대해서 아이가 실패를 경험하면 아이는 무력해집니다.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힘을 잃는 것입니다. 환경인 어른도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어른에게 기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퇴행으로 뒷걸음치거나 진전한 것마냥 가짜 진전을 공격적으로 보이려 합니다. 손가락 빨기는 퇴행의 보기이고, 거친 태도는 가짜 진전의 보기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 잘 알아보고 협력해서 섬세한 균형이 잘 이루어지면 아이는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기조절을 성취하고 독자성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변 가리기 훈련과 연관된 어른과 아이 사이의 관계 균형 이루기는 겨우 한 가지일 뿐입니다. 삶의 여러 가지 면에서 아이 쪽 ‘자기 조절’과 어른의 ‘도움’이라는 관계의 균형은 아주 중요합니다. 옷 입는 것, 밥 먹는 것, 동무들과 노는 것, 잠자는 것, 기쁨과 슬픔 같은 느낌의 ‘표현’과 ‘알아주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독자성 살리기에 다 중요합니다.

어른들이 어떻게 하는지 우리는 익숙합니다. 어른 생각으로 아이에게 주기만 하는 관계에서 아이는 받는 것이 익숙합니다. “내가 네 식성을 너보다 더 잘 알아! 그러니 받아먹기만 해!” 큰 소리 합니다. 실은 엄마의 솜씨와 식성 안에서 아이가 스스로 조절할 기회는 없어집니다. 옷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경제 사정과 취향에 따라 아이 옷을 입히고 머리 모양도 정해줍니다. 늘 머리를 길게 해주는 엄마 손에서 자란 딸이 짧은 머리를 고집하게 되는 것은 엄마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지 독자성이 아닙니다.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여정에서 누구에게 조절 당하지 않고, 자기만의 맛과 멋, 빛깔과 형태, 자유로운 느낌으로 숨쉬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방으로 어른의 한계와 조절 속에서 자란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따라하면서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의 느낌도 모르고 삽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하는 것을 갖추기 바라는 부모가 은근히 아이를 그렇게 몰아갑니다. 한 번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부모가 삶에서 이를 세련되게 보여줍니다. 용의주도하게 딴 생각하지 못하게 몰고 갑니다. 아이는 그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합니다. 동무들은 이 아이를 답답해합니다. 다양한 결의 동무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 속에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따돌림을 당해도 이유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가 제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 밖에는 다른 짓 할 줄을 모릅니다. 부모는 다행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소원성취해냅니다.

그러나 “그 뒤로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소설이나 영화는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아이의 독자성을 가로막고 있을 수 없습니다. 대학 간 다음에 튀어나올 수 있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혼하고, 노인 되어, 죽기 전에 언젠가는 자기 삶의 주인이기를 요구하는 마음이 튀어나옵니다. 부모에게 항의 합니다. 부모는 “우리 할 도리를 다 했다” 합니다.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냐” 합니다.

버젓하게 성취하게 하는 것만으로 독자성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독자성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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