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날...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6강
프로젝트

이 글을 쓰기 전에 지난 모임을 위한 글을 읽었습니다. 예언이라도 한 듯 죽음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섬뜩 느낍니다. 건강하게 자라고 성숙해가려 하지 않은 결과인 멈춤은 죽음이라는 것 말입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 넣습니다. 우리 모두 지난 4월 16일부터 이제까지 죽음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우리 모두 차가운 검은 바다 속 세월호에 갇혀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살아있으면서 죽은 것이라니!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마음이 복잡합니다. 두렵고 불안합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들더러 어른 말을 듣지 말라고도 합니다.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당장 나타납니다. 지시를 잘 따른 아이들이 구조받지 못했으니 사고난 전동차에서도 지시사항이 있기 전에 위험한 선로로 무작정 내려섭니다. 그것만으로 문제가 풀리고 삶이 제대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리무중에서 다시 반복하며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온통, 몽땅, 싹 쓸어 모조리 문제여서 어느 누구가 결백하여 “죄 없다” 할 이가 없습니다. 물론 사고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밝혀져야지요. 구조의 역할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물론 드러나야지요. 현장을 건성 맴돌기 만한 군, 관, 민이 모두 ‘이웃 노릇’하지 않은 것을 고백해야지요. 무감각의 극치인 정치, 행정의 책임자들이 재 쓰고 참회해야지요.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리고 우리 모임에서는 손가락질을 남에게 돌리는 것을 목적 삼지 않습니다. 남에게 화살을 돌릴라 치면 언제나 빗나가서 살아남는 이들이 또 다시 이런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있었던 수많은 사고들 이후에 똑같은 진단을 했었지만 이번에도 또 똑같이 반복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왜 이리도 무감각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는 비윤리의 사람,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이 되었는지 그 뿌리를 찾아 고쳐야 합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나면 언제나 짐승들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윤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연어를 충분히 잡아먹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물곰 엄마와 아기의 슬기롭고 책임 있는 삶을 기록한 다큐를 부분으로 잠깐 보았습니다. 위험 속에서 곰 엄마-아기 팀이 서로 즐기며 협력하여 첫해를 지나면서 다음 해에는 아기가 엄마에게 배운 것으로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사람 아기도 이 험하다는 세상과 연관되어 있는 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잘 익혀야 합니다. 부모가 다 대신해주고, 처음부터 끝 날까지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믿지만 사람은 못합니다. 세월호에서 부모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향한 가족들의 (우리의) 죄책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해줄 수 없는 것을 해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주제넘은 일입니다.

아이들이 어른의 보살핌을 고맙게 받으며 고맙게 느끼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엄마의 사랑의 보살핌을 당연하다는 듯 고마움도 없이 자기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 사랑의 마음을 고마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존재가 소중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도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모르고) 자기만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세월호와 관련된 수많은 어른들의 부끄러운 짓이 그런 사람 때문에 생긴 겁니다. 어디 선장뿐이겠습니까?

다른 아이에게 구명조끼를 건네준 정차웅군, 아이들을 먼저 구하고 간 박지영님, 여러 아이들을 구하고도 더 구하지 못하고 살아나온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름 밝히지 않는 이들은 자신과 엄마를 서로 고마워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아기가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기 위해서는 엄마도 아기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또 먼저 엄마 자신의 마음을 알아, 표현, 전달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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