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2강
프로젝트

지난 토요일 자정 가까운 시간에 최인영님의 친정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니>에 여러 번 쓴 인영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떠나신 분에 대해 다들 조금씩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영님의 마음은 이미 그 글에 멈추어있지 않습니다. 글을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 아버지를 달리 보는 눈이 생기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들 합니다만 실은 사람 사이의 마음은 늘 바뀌는 진행형입니다. 우리들도 모두 인영님의 그 옛 글들에 묶여있지 말고 다른 마음으로 떠나신 그 분과 인영님의 관계를 보려 해야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사이에 두고 인영님은 아버지를 느낄 수 있게 된 겁니다. 앞으로 살아 있는 한 그 관계는 계속 진행될 겁니다.

아버지 마음을 당연히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어린 시절의 마음만으로 경직되게 아버지를 보고 지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경우 다른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어른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오해하도록 방해하기도 합니다. 아이와 친구 같이 지낸다는 엄마들이 아빠에 대한 불만을 아이에게 털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가 아빠를 미워하게 만들고는 부부는 아이가 모르는 방식으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도 합니다. 아이는 부모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아이로 존중하며 적절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의 감정 쏟아놓을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의 친구일 수 없습니다. 더더구나 상담자일 수 없습니다.

어머니도 못 알아보신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따님의 애타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인영님과 서로 눈으로 마음을 나누고,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잡은 감격스런 경험을 했답니다. 그건 그 사이에 인영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같이 발맞추어 바뀌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늙은이와 보조를 맞추어 함께하는 젊은 이웃들이 있어야만 그 관계가 제대로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양편 모두 따스한 체온을 느끼게 됩니다. 늘 살아 있는 영원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죽음이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아니라 건너 뛸 수 있는 겁니다. 죽음 저편으로 떠나는 늙은이도 슬프지 않고 죽음 이편에 남은 사람들도 슬프지 않습니다.

평생을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공유하며 잘 사신 늙은이들은 혼자 남겨지지 않고, 몸으로는 세상 떠나도 젊은이들 마음에 남아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젊은이들도 늙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 삶을 떳떳하고 용기있게 살아가게 늙은이가 젊은이를 돕습니다. 늙은이가 마지막까지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게 됩니다. 위대한 유산은 물질을 남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남겨줍니다. 돈의 문제로 상담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손에 쥐어주는 것 없이 맨입으로, 말만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때는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하려고 합니다.

평생 동안 돈과 성취만을 추구해온 사람들이 늙어 즉음을 앞두고 무엇을 느낄가요? 눈에 보이는 반쪽 인생을 바라서 살아 온 허무함, 아마 반쪽도 되지 못하고 헛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식도 다 소용없다는 말을 합니다. 황혼 이혼이 많아지는 걸 보면 배우자도 소용없는 것일 터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처지에 극심한 서글픔에 빠질 것입니다. 우울증에 빠진 이들도 많을 겁니다. 남 보기에 아닌 척 일상을 살면서도 속으로는 한심하기 그지없을 겁니다. 자기 처지가 한심하다 여길수록 다른 사람에게 트집 잡을 것을 밝힙니다. 이래도 저래도 마땅치 않은 불만 덩이가 됩니다. 감사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젊은 이웃과 잘 지낼 수 없습니다.

평생을 걸고 이웃들과 마음을 트지 않은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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