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기를 부모의 책임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5강
프로젝트

모든 부모들이 아이 기르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아이를 뚝 떼어놓아 눈앞에 두지 않고, 마음에서 털어버릴 수 있다면 살 것 같다고 합니다. 아이가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 일부러 아이가 다니는 곳을 피해다녔다는 엄마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불만인 자기가 아이와 대면하고 나서 보일 세련되지 않은 태도가 자기 마음에 들지도 않고, 아이나 자신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셈입니다.

태어나서 갓난이 때부터 (기초신뢰감이 생기는 때), 아장 거리며 혼자 걷는 아기 때 (독자성이 발달하는 시기), 놀이시기(솔선하는 특성이 자라는 때)를 거쳐 학령기 (훈련 시기), 사춘기(자기 정체감 영그는 때), 청년기 (깊은 관계 맺기)에 이르기 까지 스스로 부모가 되기 전까지 건강하게 성숙해갈 권리가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 과정은 부모의 책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자녀 양육의 역할은 다음세대의 이런 건강한 몸-마음-영혼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사회로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면 학교도 사회도 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엄기호 씀)는 책도 나온 것입니다.

어떤 여고교장 선생의 “창피하다”는 체험을 들었습니다. 중간시험 기간인데 교복을 제대로 입지 않고 학교에 온 아이들이 교장 눈에 띄었답니다. 단단히 주의를 주고 선생들에게도 잘 지도해주기를 부탁했답니다. 그런데 잘 되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아이들에게 야단치는 중에 몇 명이 살짝 도망치 려했고 잡혀온 아이 가운데 다른 아이들 틈에 숨어 나오지 않는 아이가 하나 있었답니다. 결국 찾아낸 그 아이에게 부모를 만나야겠다고 했답니다. 울면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전화했답니다. (손 전화는 다 가지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곧장 달려온 아버지가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고 교장과 협조해서 적합하게 가르치리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반응을 전혀 기대와 달랐습니다. “왜 내 아이를 울렸느냐?” 하는 강경한 반응을 보였답니다.

교복을 꼭 입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것이 필수로 해야 할 행동인지 아닌지를 따지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수만큼 다른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똑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어떤 규칙도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합의해서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학교가 일방으로 모든 규칙을 결정했다면 문제입니다. 그리고 합의로 결정된 규칙을 지키는 것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해야 할 자세입니다. 그런데 왜 억지로 강요하는 어른과 될 수 있는 한 지키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생겨날까요? 가정에서 그런 합의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기초신뢰감이 든든하게 자라도록 기른 부모라면 독자성을 갖추고 자기만의 독특한 의견을 솔선해 표현하는 것을 부모가 존중하고 잘 들어줄 것입니다. 또 설득력있게 표현할 훈련도 받고 기회를 누렸을 것입니다. 아이의 뚜렷한 자기표현을 부모가 권장할 것이고, 부모도 다른 의견을 가졌다면 그 다른 의견도 아이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서로 듣고 표현하는 기회를 충분히 가지고,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을 거쳐서 선선히 합의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에서 자랐다면 교장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내놓을 것이지, 도망치거나, 걸려서 숨거나, 울면서 아버지에게 전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학교뿐 아닙니다. 교회도, 정치도, 경제도, 언론도 모두 제대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거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우리 사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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