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우애 있는 가족을 만듭니다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3강
프로젝트

연년생으로 아들 둘을 길렀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둘이 싸움을 많이 했겠군요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고 뒤돌아보면 두 아이가 싸운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에 놀랍니다. 어려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둘 사이의 이야기가 끊일 줄 몰라 그만하고 자라는 재촉을 매일 몇 차례씩 했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두 아이는 제일 가까운 친구로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유난이 순해서 그랬을까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낯선 곳에서 자라고 살아가면서 아이들이 나름의 투지도 보이는 걸 보면 마냥 순하기만 한 아이들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아이들 사이의 우애는 아이들의 과제라기보다는 부모와 아이들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상담실에서 만난 여성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부모가 사이가 좋지 않고, 술에 절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도저히 살 수 없어 두 분이 갈라섰답니다. 삶이 고달픈 어머니가 늘 아이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말을 했고, 언니는 한 살 아래 동생을 늘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똑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세 모녀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며 살려고 했으면 그렇게 서로 상처주며 살았을까 안타까웠습니다. 가장이 감옥살이하는 다섯 해 동안 올망졸망 4남매를 데리고 여러 가지 일을 해내면서 지내는 젊은 엄마와 가족의 삶을 다큐같이 그린 영화 <에브리데이>를 지난 주에 봤습니다.

마음을 알아주며 사랑을 키우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는 부모가 가족의 우애를 살립니다. 그러기에 새벽같이 아이들을 깨워서 영국의 궂은 날씨에 걸맞게 겹겹이 옷을 입혀 몇 번씩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수백 Km를 떨어진 먼 감옥을 머다 않고 가족들이 면회하러 갑니다. 바뀌는 계절에 따라 긴 여정의 배경 경치도 바뀌고, 다섯 해가 가는 동안 아이들이 훌쩍 자랍니다. 잠깐의 면회시간이 다 하면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아버지가 좁은 감방에 홀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언제나 무거운 음악이 흐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지요. 아빠와 헤어지기 싫다고 커다란 눈 가득 눈물 흘리는 서너 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면회하는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엄마는 아이를 뚝 그치라욱박지르지도 않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부모가 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우리는 잘 해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두어 가지 배경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중심인 경우입니다. 자수성가한 사람 가운데 이런 특성이 생겨나기 쉽습니다. 자기가 해낸 것이 아주 자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과도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보이기 쉽습니다. 특히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는 어른에 비해 아이들은 작고 부족해 보이기 쉽습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보호받고 보살핌 받으며 의존해서 살아야하는 처지에 있는 자녀들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자수성가한 이런 사람이라도 사람의 존재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살피는 성찰의 마음이 있다면 다를 수 있습니다. 세대를 넘어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있고 뜻을 품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이 온통 삶의 전부라 여기거나 학식이나 권력이 전부라 여기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틀에 매여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단호하고 급하게 냉엄한 판단을 내립니다. 우리는 쟈베르 경감과 쟝발쟌의 차이를 봅니다. 그들이 어떤 부모가 될 것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달리 자란 자녀들이 어떤 특징을 지닐지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가 그 어느 쪽 특징을 가졌어도 우리 세대에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느끼고, 보고, 들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첫 아이에게 못했다면 둘째에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내 아이에게 못했다면 이제 이웃 아이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를 향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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