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요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프로젝트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 냄비가 거리에 등장합니다. 얄팍한 봉투에 든 큰 액수가 오늘 저녁 뉴스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많건 적건 모아진 돈으로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를 돕는 일을 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뉴스에 전직 대통령 아들의 이혼 소송 건도 들어있습니다. 결혼한 두 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한다는 통계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이혼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하겠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로 이혼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이제는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기 전에는 결혼 신고도 하지 않는다는데 그들은 결혼 21년 만에 이혼하는 것이니 꽤 준수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직 대통령인 신랑의 아버지의 비자금을 재벌인 장인이 숨겨 돌려쓰고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 아닌 소문 탓에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억대의 기부를 이름 밝히지 않고 하는데, 어떤 이는 나라의 돈을 자기 돈이라도 되는 듯이 움켜쥐고, 숨겨두고 나라에 내야 할 벌금을 내지 않으려 버틸까요? 다 같이 단군의 자손인데 왜 그런 차이가 나올까요?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아파하는 사람은 자기만 아프지 않으면 된다는 사람과 전혀 달리 살게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자식 사랑을 표현합니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극진하고 공평한 부모 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렇게도 아이를 사랑한다는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하면서, 아이들 사이에 공감할 기능을 살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도와주지 못합니다. 서로 동감하고 아끼는 마음을 길러야 아낌없이 사랑의 ‘자선냄비’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자선냄비에 아이 손으로 돈을 넣게 하는 어른들을 봅니다. 그것도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놀이시기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며 지내는 경험을 흠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나를 보며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동무를 하도 좋아해서, 집에 가겠다는 동무를 붙잡아 더 오래 함께 놀고 싶어 그 동무가 원하는 걸 다 주려고 하는 나를 “착하다” 하셨습니다. 지금도 균형을 잃는다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손해 볼 짓을 하지 말라”고 야무지게 다짐하는 다른 엄마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만큼 야무지고 똑똑한 아이들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내 어린 시절보다 이제는 점점 더 심해집니다.

부모와 동일시하게 되는 아이들은 부모의 가치를 내면화합니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부모 품에서는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좁디좁은 품을 만듭니다. 넓은 사회에서 협력하며 살만한 품을 기르지 못합니다. 기쁨, 슬픔, 아픔이 묻어나는 삶을 함께 나누는 것 (共有)을 손해라고 여기게 만드는 어린 시절 때문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외롭습니다. 아무리 제 앞가림을 잘 하게 길러졌다 해도 어차피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자기 가족 안에서 하면 된다 해도 그런 틀로 자란 가족이 서로에게 그다지 너그러울 수 없어 서로 상처만 줍니다. 형제자매 사이가 남들보다 나을 수 없게 됩니다.

다양한 동무들을 사귀면서, 서로 다른 것을 동등하게 인정하면서, 협력하는 놀이 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며 살게 하는 평화스런 여생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서로 잘난 척하지 않아도 되고, 서로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저울질 하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뜻의 공평함을 맛보게 합니다. 세상살이에 함께 활동하며 참여 함에도 서로 아끼며, 서로 알아주고, 서로 감사하고, 길고 짧은 것을 문제 삼지 않고, 모두 고르게 가치를 쳐주는 체험을 하게 합니다. 이건 분명히 ‘손해 볼 짓’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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