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아이가 자기 독자성을 지키려는 발달의 애매한 투쟁과정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긴장'에 대비되는 '내버리는 느긋함'을 번갈아 실험하면서 독자성을 향한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항문기를 강조하는 분석학에서는 항문 주변의 근육의 수축으로 참는 쾌감과 그에 대비되는 근육의 이완으로 얻는 풀려나는 편안함 쾌감을 말합니다.
변 가리기 훈련은 한 보기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 조절의 묘를 살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스스로 조절하는 기능의 발달을 어른이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어른들이 강제로 하게 하거나 너무 일찍 조절할 것을 기대해서 아이가 실패를 경험하면 아이는 무력해집니다.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힘을 잃는 것입니다. 환경인 어른도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어른에게 기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퇴행으로 뒷걸음치거나 진전한 것마냥 가짜 진전을 공격적으로 보이려 합니다. 손가락 빨기는 퇴행의 보기이고, 거친 태도는 가짜 진전의 보기입니다.
독자성이 생기면 자기가 웃을 만할 때 웃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자기를 보고 웃을 만한 일인지 점검을 합니다. 눈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은 필요한 정서이고 훈육할 때도 적합하게 쓸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흔히 ‘주책’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독자성이 생기는 때에서 놀이시기로 넘어가는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자기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도 자기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알아 행동하는 것이 장래 건강한 사회생활의 기본입니다. 배설물을 몸 안에 간직하고 느끼는 긴장된 쾌감과, 내보내는 시원한 쾌감을 알고 어느 편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인가를 미루어보기도 합니다. 자기 것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는 구두쇠, 깍쟁이가 될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 될 것인가의 갈림길입니다. 앞의 경우, 억제하고 파괴적이고 냉정한 사람으로 살게 될 수 있다면, 뒤의 경우는, 너그럽고 여유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의 독자적인 마음에 관한한 무식한 어른들에 휘둘리고 그 어른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아이로 길러지면 아이는 자기표현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입맛을 다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큼 모두 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누구의 장단에나 맞추어 춤을 출 수 없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해도 어느 누구에게인가는 거슬리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때 자기 마음에 따라 한 말이나 행동이지만 뒤돌아보면 언제나 후회를 불러오고 맙니다. 그것이 수치와 의심입니다.
진정한 독립은 독자성을 살리는 독립이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의 이름으로 경제의 독립만을 주로 독립이라 여기는 오늘, 우리 사회의 개념으로만 참 독립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의 내면이 요구하는 마음의 ‘현실’을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태어나서 한 번 사는 귀한 삶인데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기쁘고 환하게 삶을 구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취만으로 충분하다는 잘못된 사회의 요구를 넘어선, 자신의 마음과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다운 사랑이 필수조건입니다.
다양한 동무들을 사귀면서, 서로 다른 것을 동등하게 인정하면서, 협력하는 놀이 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며 살게 하는 평화스런 여생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서로 잘난 척하지 않아도 되고, 서로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저울질 하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뜻의 공평함을 맛보게 합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내면의 소리가 다 들리고 서로 들어주는 사회를 만들면 어떨까요? 그러려면 아이들이 내는 소리를 어른들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끼리도 서로 다른 마음의 소리를 듣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뭔가 해야 하는 강박감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그냥 서로를 느끼고, 알아주고, 아끼는 마음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놀이기구를 사주고, 놀이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데려간다고 해서 충분히 될 일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놀이 틀’에 맞추게 해서는 아이들 스스로 솔선해서 놀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솔선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그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가 살 인간관계도 스스로 택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살아갈 그들의 세상을 솔선해서 만들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어진 것을 수동으로 하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상황에서 자신이 적극으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지도자 탓, 남 탓만 하며 살게 됩니다.
“놀 줄 안다”는 말이 춤을 잘 추고, 운동을 잘 하고, 말을 잘 하고, 꾸밈이 화려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재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거침없이, 자기답게, 진실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을 가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