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운 관계 (intimacy)를 맺는 때라고 에릭슨이 말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나이가 차면 절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혼자-듣고-받아쓰고” 살기만 해서는 가까운 관계를 맺고 같이 사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신혼 시절은 멀리까지 깨소금 냄새가 풍긴다며 재미있게 놀리듯 말하지만 실은 겪어내기 아주 힘든 때임을 숨겨두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는데 우리는 열심히 혼자 사는 훈련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려했던 여권운동이 실제로 보통 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국제기구의 연구결과가 신문에 간단하게 보도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OECD 나라들 가운데 남녀 임금격차 크기에서 1등이랍니다. 60년대 여성운동이 서구에서 활발해지고 우리도 덩달아 70년대 후반부터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문제는 고위층 여성들의 ‘유리천장’을 깨는 구호에 치우쳐서 밑뿌리 여성들의 삶을 외면한 셈이 되었습니다. 꼭대기의 여성들의 진출이 많아지면 모든 여성에게 혜택이 가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에도 나는 몇몇 여성들이 남성들의 대열에 편입한다고 해서 밑바닥 여성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홀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위에서나 아래에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며 사는 것을 쉽게 발견합니다. 가까이 부모님부터, 언니네 오빠네 부부, 결혼 한 친구들의 사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려 하는 것이 서로를 소외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두 사람이 계속 건강하게 ‘진정으로 두 사람’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각자가 또 서로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침마다 울면서 일어났는데 그 이유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양육자 어른이 아이가 우는 이유를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도 자신이 울고 싶은 마음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인지 이름표를 붙이는 (labeling)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고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때인 청년기에 제대로 잘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깊은 관계를 맺는다고 자기를 매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하는 것’(intimacy)과 동시에 ‘거리두기’(distantiation)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매몰’(self-absorption)되어서는 안 됩니다. 위에 말한 ‘고민 니’가 계속 일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과 일하는 것을 같이 병행해야 하는 자신을 건강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결국 아이 시절을 거치고 사춘기에 이르고 또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살지 머리에 그려놓은 삶의 설계도가 얼마나 자기답게 명확한지에 달린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일관성있는 자기다운 내면의 정체감을 지니면서 실험이 허용되는 사춘기를 충분히 거치고 결단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국제관계나 경제상황에 따라 중국어가 인기과목이 되고, 독문학이나 불문학은 대학에서 살아남기도 어려워지는 이 나라에서 젊은이가 일관성있는 정체성을 지니기 힘들기도 합니다. 자기 길을 자기 내면의 소리로 정하지 않고 바깥 요인에 맞추어 자기 길을 찾으려 하니 말입니다.
또 “초록이 동색”이라는 우리의 억지를 떠올립니다. 같은 것을 기대하니 서로 다른 것을 피하게 됩니다. 아니, 나와 다른 것을 이상하다 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달라서 좋아!”의 느낌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인류 모두를 품을 수 있습니다.
청년기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즐기는 때였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사랑으로 몸을 섞을 짝을 만나 함께할 삶을 바라 계획하는 단계를 밟게 됩니다. 삶의 모습인 성격과 온갖 힘을 합해서 두 사람 공동의 후세를 맞아 보살피려 하는 ‘바람’(wish)을 갖습니다. “우리 두 사람 공동의 아이를 가지고 기르려는 뚜렷한 ‘바람’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들 하는 나이에, 남들 하는 결혼을 하고, 남들같이 살다 보니, 아이가 생겼다”는 자세와 달라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