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건강하게 이르기까지 아이들 곁 가까이에 늘 건강한 어른의 살아있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 합니다. 태어나 첫 해에 기초신뢰감을 든든히 갖추는 때부터 신뢰감을 줄 어른이 아이 곁을 버티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른들 사이에 흔들리는 관계 때문이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양육자 어른이 아이에게 안정된 신뢰를 잃게 되면, 아이가 자신도 신뢰받을 어른이 될 약속을 자리매김 하는 ‘자아의 힘’(ego strength)을 키워가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자기자신만의 느낌, 생각을 살리며 자신만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궤도를 벗어나 어긋난 길을 가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됩니다. 자기만의 ,색깔과 삶의 맛을 잃게 됩니다. 인생의 종결지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허망할까요?
어른들이 마음의 사춘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살아온 것을 고백합니다. 또래들과 부모, 교사들과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같이 협력하며 살아가는 방법, 고룻한 기회를 공유하는 삶의 태세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냥 허겁지겁 먹고 살기에 바빠서 자기다운 삶의 자세 (sense of identity)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다운 됨됨이 같은 것을 따로 가져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깡그리 잊고 살아왔습니다. OECD 국가에 끼면 뭘 합니까? 사람답게 사는 척도에서는 늘 꼴찌이고, 아이들 (청소년) 자살률에서만 1등이라 금메달이라며 좋아할 수 있습니까?
사춘기 이전에 자신의 특성과 욕구를 알고 인정하면서,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다른 사람과 함께 적절하게 조절하며 훈련을 쌓는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하게 되고, 바깥에 목숨을 거는 이런 불행한 현상이 생깁니다. 바깥 환경도 현실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기의 어느 나이에 잠정으로 파악한 것을 확신하고 고집스럽게 우상을 삼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자기의 믿음과 도덕률을 설정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항상 그에 빗대어 보아 엄격하게 판단하려 합니다.
마냥 익숙한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이들더러 적응하기만 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속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 했던 어른들이 아이들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우리 모두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 아파했습니까. 우리 아이들 “땅위에서 숨 쉬고 살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요?” 아닙니다. 몸으로는 살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질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을 가름하는데도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낸 온갖 자(척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명감을 가졌는가는 상관없어 관심도 없고 묻지도 않습니다. 연봉이 얼마인지, 얼마나 알아주는 일인지가 중요한 척도입니다. 결혼중개소에서 문과 계열 대학원생은 목록에도 오르지 못한답니다. 웬만한 지방 대학은 입사원서 목록에 오르지도 못합니다. “몇 시간 자는가?”에서 “성적 등급이 뭔가?” “한 문제 더 풀었는가?” 따져 묻게 됩니다. 들어간 학교가 “어느 지역 어느 급의 대학인가?” “어떤 전공인가?”를 갈라서 봅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단계는 취직한 곳이 “어느 규모 기업인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에 따라 연봉의 크기를 또 눈독 드립니다. 그러니 아주 어린아이들부터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친구 고르기에 척도가 됩니다. 부모의 직업과 지위만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재산규모가 어린 손주들의 배경이 됩니다.
어떤 가정에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하며 살 것인가를 스스로 결단하고, 실행하며 사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을 성실하게 걸으면서 해야 할 일을 하고, 갖추어야 할 마음을 품으며, 서두르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의 과정을 거쳐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