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세대에 걸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부모님은 그들 삶의 몫이 있는 것이니 존중하는 마음으로 떨어져나가라고 합니다. 부모를 외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유기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다음 세대를 이룩하고 돌보는 것이 책임이듯이 다음 세대도 또 그 다음 세대를 이루고 돌보는 것이 각 세대가 짊어질 삶의 각각의 몫입니다.
우리나라 여성학이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여자가 다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에 밥벌이만 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기 낳고 젖먹이는 것은 남자가 못 하지만 관계 맺고 사는 사랑의 보살핌을 여성들조차 저버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보살핌의 삶을 남성들에게 설득하고 전하여 그 영역도 같이 할 것을 말하려는 겁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건강하고 성숙한 부모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기르는 것에 책임을 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깥일 하는 것으로 아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모두 제공한다고 할 일 충분히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에릭슨은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를 책임있게 양육하지 않으면 아무리 자녀를 두었더라도 후손을 두는데 실패한 ‘정체’(Stagnation) 상태로 보았습니다. 아무리 딸, 아들을 여럿 낳았어도 다음 세대를 제대로 든든히 세우고 잘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어른’ (성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자녀가 없더라도 다음 세대를 위해 이타적 (altruistic) 관심과 자기다운 기여를 한다면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라고 살아온 기준으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부모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기를 알아달라고 표현하지 못하게 아이를 만듭니다. 적절하게 아이를 도와주지는 않고, 부모 자신들과 달리 하는 것을 ‘잘못한 것’이라고만 여기고 아이를 무시하고 혼내기만 합니다. 바깥 세상에 나가 누구나 순조롭게 열매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힘들 때 돌아와 이해에 터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부모의 품이 아니라 여기니, 믿어주지 않는 그 부모에게 아픔을 드러낼낼 수가 없습니다. 아이 때문에 속상해 몸까지 아프다는 엄마에게 그 아이는 엄마보다 더 아프다고 말해줍니다.
“부모 말 잘 들어라” 하지 말고 “아이 말 잘 들어서” 아이 뜻을 펴게 해야 합니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 마음을 알아주며, 서로 존중하며, 서로의 뜻을 살피며 살면, 아이가 자기 뜻을 펴며 살면서도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는 ‘효자’ ‘효녀’가 자연스레 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아이들도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으면서 또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과 널리 ‘함께’ 협력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만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우리 모두 탄핵받은 지도자뿐 아니라 그 이전의 지도자들에게서 생생하게 보아왔습니다. 우리 모두 합심해서 자폐아를 양성해서야 되겠습니까?
아이의 기초신뢰감이 든든하게 자라도록 기른 부모라면 독자성을 갖추고 자기만의 독특한 의견을 솔선해 표현하는 것을 부모가 존중하고 잘 들어줄 것입니다. 또 설득력있게 표현할 훈련도 받고 기회를 누렸을 것입니다. 아이의 뚜렷한 자기표현을 부모가 권장할 것이고, 부모도 다른 의견을 가졌다면 그 다른 의견도 아이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서로 듣고 표현하는 기회를 충분히 가지고,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을 거쳐서 선선히 합의에 이를 것입니다.
“아빠 닮았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던 아이는 엄마가 하는 아빠 흉을 잔뜩 들은 탓에 생긴 일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엄마가 같은 말을 했다면 아이가 싫어했을까요? 게다가 아무리 부모 어느 편을 닮았어도 아이는 또 부모와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입니다. 아이가 부모와 다른 존재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모도 아이를 사랑한다고는 생각합니다. 부모로의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위해 헌신하고 아낌없이 베풉니다. 문제는 자기의 생각과 판단으로,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고, 귀여운 아이들이 품에 있는 여성들은 눈을 바꿀 기회가 가깝게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눈을 고치려면, 잘못 보고 있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주장하지 말고, 남편과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같이 보려 하고,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같이 느끼려고 해 보는 겁니다. 시력과 함께 청력도 좋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마음을 열고 굳어진 자기 마음도 유연해져야 합니다. 남편에게서 가해자의 누명을 벗겨줍니다. 자기도 언제까지 피해자 노릇만 하고 있을 수 없지요.